랴오핑
[ 廖平(료평) ]
- 요약
중국 청말(淸末)의 유학자. 관리가 되지 않고 청두에서 공교부론사(孔敎扶論社)를 조직하여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처음에는 송학(宋學)을 배우고 훈고고증학(訓詁考證學)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연구하여 청말 공양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출생-사망 | 1852 ~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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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계평(季平) ·등연(登延) |
호 | 학재(學齋) |
국적 | 중국 청(淸) |
활동분야 | 유학 |
출생지 | 중국 쓰촨성[四川省] |
주요저서 | 《오경주소(五經注疏)》 《육역관총서(六譯館叢書)》 |
자 계평(季平) ·등연(登延), 호 학재(學齋). 쓰촨성[四川省] 출생. 광서연간(光緖年間:1875∼1907)에 과거에 합격해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고, 청두[成都]에서 공교부론사(孔敎扶論社)를 조직하여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처음에는 송학(宋學)을 배우고 훈고고증학(訓詁考證學)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연구하여 청말 공양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1887년 《금고학고(今古學考)》를 저술하고, 금학(今學)과 고학(古學) 양쪽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학적(經學的) 입장을 취하였으나, 다시 금문학(今文學)의 길을 택하여 《벽유편(闢劉篇)》 및 《지성편(知聖篇)》을 저술하였다. 그 즈음(1889∼1890)에 만난 대학자 캉유웨이[康有爲]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후에 캉유웨이의 학설은 랴오핑학설의 표절이라는 정평(定評)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입장이 끊임없이 변하여 그의 학설을 5, 6회나 바꾼 탓으로 당시의 사상계를 이끌지는 못하였다. 중화민국 수립 후에 청두의 국학원(國學院) 원장을 지냈다. 저서에 《오경주소(五經注疏)》 《육역관총서(六譯館叢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