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문학

금고문학

[ 今古文學 ]

요약 중국의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

한(漢)나라 때 사용된 글씨체인 예서(隸書)로 쓴 것을 금문이라 하고, 진(秦)나라 이전의 글씨체인 고주(古籒)로 쓴 것을 고문이라 한다. 양자는 글씨체가 다를 뿐이었으나 어느 계통의 텍스트로 학설을 세우느냐에 따라 학풍(學風)을 달리하였다.

금문학은 전한(前漢) 때 성행하였으며, 14박사(博士), 즉 《역(易)》은 시수(施讐) ·맹희(孟喜) ·양구하(梁丘賀) ·경방(京房)의 4가(家), 《시(詩)》는 노시(魯詩) ·제시(齊詩) ·한시(韓詩)의 3가, 《서(書)》는 구양생(歐陽生) ·대하후(大夏侯) ·소하후(小夏侯)의 3가, 《예(禮)》는 대대(大戴) ·소대(小戴)의 2가, 《춘추(春秋)》는 공양(公羊)의 엄팽조(嚴彭祖) ·안안락(顔安樂)의 2가가 학관(學官:漢代 이후의 대학강좌)으로 세워졌다.

전한 말(前漢末)의 평제(平帝) 때에는 유흠(劉歆)이 고문학을 학관으로 세울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고문상서(古文尙書)》 《모시(毛詩)》 《일례(逸禮)》 《좌씨춘추(左氏春秋)》가 학관으로 세워졌으며, 또 왕망(王莽) 때에는 《주례(周禮)》도 세워져서 고문학이 진출하였다. 금문학은 사설(師說)을 잘 지키고,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참위설(讖緯說) 등을 내세웠는데, 이에 비해서 고문학은 훈고학(訓詁學)적인 실증(實證)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후한(後漢) 때에이르러 양자간의 논쟁이 활발해졌으며, 장제(章帝) 때(79)에는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의 동이(同異)’가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이 양학을 고문학 중심으로 겸수절충(兼修折衷)하였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 때 금문학은 완전히 없어지고 고문학만이 성행하였는데, 청나라 때의 도광제(道光帝)와 함풍제(咸豊帝) 이후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중심으로 한 금문학이 다시 일어나, 장존여(莊存與) ·유봉록(劉逢祿) ·공자진(龔自珍)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담사동(譚嗣同)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캉유웨이는 이 금문학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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