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풍패지관

전주 풍패지관

[ 全州 豊沛之館 ]

요약 전주객사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의례 공간. 1975년 3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주 풍패지관

전주 풍패지관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75년 3월 31일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3가 1번지
시대 조선시대
크기 건물

전주객사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객사(客舍)로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전주에 머물 때 사용하던 숙소이다. 전주객사는 정청(正廳)인 풍패지관(豊沛之館)과 동·서익헌으로 구분되는데, 풍패지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객사의 정청에서는 망궐례 뿐만 아니라 전문(箋文)을 올리는 의식, 교서(敎書)를 받는 의식, 내향(內香)을 맞이하는 의식, 관찰사(觀察使)를 맞이하는 의식 등 여러 의례 행사가 행해졌으며, 관아보다도 위계가 높은 관영시설로 고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전주객사의 역사

전주객사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471년(성종 2)에 전주서고(全州書庫)를 짓고 남은 재료로 전주객사를 개축(改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전주객사 정청에서 망궐례가 더 이상 치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주객사는 객사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1914년 전주부성의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도로 확장공사로 전주객사의 동익헌이 철거되는 등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주객사의 여러 부속건물들이 훼철되었다. 1971년 12월 2일 전주객사가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5년 3월 31일 전주객사의 정청인 풍패지관이 보물로 승격지정되었다. 이후 1999년 동익헌을 복원하는 등 전주객사 복원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풍패지관 명칭의 유래 

'풍패(豊沛)'는 중국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고향으로, 왕조의 본향(本鄕)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비록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으나, 전주는 이성계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자, 전주 이씨의 관향(貫鄕: 시조가 태어난 곳)이기에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불렀다. 풍패지관의 명칭은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 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풍패지관의 건축 양식 

전주 풍패지관은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현전하는 객사 건축물 가운데 여수 진남관, 나주 금성관, 통영 세병관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의례적 공간이었던 정청이 동·서익헌보다 위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청의 기단을 좌우 익헌보다 한 단 높게 설계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로 꾸며진 맞배지붕 형태이다. 장대석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올리고 그 위에 원통형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외일출목 주심포 양식의 공포를 올렸다. 건물의 전면 1칸은 툇마루로 꾸몄으며,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진 넓은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건물의 중앙에는 '豊沛之館(풍패지관)'이라 적힌 큼지막한 편액이 걸려있다. 

가치 및 의의

전주 풍패지관은 전주객사의 정청으로 조선시대에 전주부 관내의 많은 공적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방 객사들이 훼철되었으나, 전주 풍패지관의 경우 철거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5년 3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조항목

객사

역참조항목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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