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화

이월화

[ 李月華 ]

요약 한국 최초의 여자배우. 일본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저축홍보영화 《월하의 맹세》에 출연하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1920년대 영화계의 대표적 배우로 활동하였다.
출생-사망 1904 ~ 1933
본명 정숙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서울
주요작품 《부활》 《월하(月下)의 맹세》 《해(海)의 비곡(悲曲)》(1924) 《알트 하이델베르크》

본명 이정숙(李貞淑)이며 1905년 서울(경성부 창성동)에서 출생하였다. 하지만 이월화의 출생과 관련한 몇가지 이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하기 어렵다. 학력은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화학당을 중퇴하였다. 일찍 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는 개가하여 양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1918년 김도산이 이끄는 신파극단 신극좌(新劇座)를 거쳐 1921년 여자배우로만 구성된 여명극단에 입단하였다. 1922년 윤백남(尹白南)이 창단한 민중극단(民衆劇團)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부터 월화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민중극단에서는 《등대직(燈臺直)》 《진시황》 《사랑의 싹》에서 공연하였고 특히 《영겁의 처》에서 오르가 역을 맡았는데 이것으로 주목받는 배우가 되었다. 이듬해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계몽용으로 제작한 홍보영화 《월하(月下)의 맹세》에 출연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당시의 영화계에는 여배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1920년대 영화계의 대표적 배우로 활동하였다.
1923년 동경유학생이 주축이된 토월회(土月會)의 신극 공연에 여주인공으로 제안을 받고 공연하였으나 제1회 공연은 실패로 끝나고 1923년 9월 18일 제2회 공연 《부활》에서 카추샤역을 맡아 연기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4년 톨스토이 원작인《산송장》에서 마샤역을 맡았고, 《알트 하이델베르크》, 《카르맨》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토월회를 이끌던 박승희(朴勝喜)와의 사랑에 실패한 이후 좌절상태에 빠져 토월회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녀의 사생활은 음주와 남성편력으로 더이상 연극무대를 잃게 되었다.

그해 부산에 기반을 둔 조선키네마 영화사의 제의를 받고 영화 《해(海)의 비곡(悲曲)》(1924)에 출연하였으며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이 영화에 함께 출연한 이채전(李彩田)과 달리 이월화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운영전》에 주연배우로 발탁될 예정이었으나 감독을 맡은 윤백남의 반대로 거부되자 영화출연을 그만두었다. 이후《뿔빠진 황소》(1927) 《지나가(支那街)의 비밀》(1928)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오양가극단을 창단하였다가 실패하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댄서로 활동하였다가 이춘래를 만나 결혼하였다. 귀국하여 수원에서 잠시 살았다가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녀의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귀국하였다가 상하이로 돌아가던 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월화의 죽음을 두고서는 자살이라는 이견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망당시 그녀의 나이 29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