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한국영화와 민족영화

초창기 한국영화와 민족영화

한국에서 비로소 완전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23년 윤백남(尹白南)이 감독한 《월하(月下)의 맹서(盟誓)》였다. 이 작품은 비록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영화이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필름 제작이었다.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남자가 착실한 약혼녀의 저축으로 갱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득한 초창기의 작품이었지만 차분한 묘사로 호평이었고,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李月華)를 배출시켰다.

이 무렵부터 한국에서의 영화제작이 본격화하였다.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가 《춘향전(春香傳)》(23), 단성사 제작부(製作部)가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24)을 제작한 것을 비롯하여, 부산에서 창립된 최초의 영화제작회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해(海)의 비곡(悲曲)》(24)을 제작 공개하였다. 이어서 윤백남 프로덕션이 《심청전(沈淸傳)》(25)을, 고려키네마가 《개척자(開拓者)》(25)를, 고려영화제작소가 《쌍옥루(雙玉淚)》를, 반도(半島)키네마가 《멍텅구리》(26)를, 계림(鷄林)영화협회가 《장한몽(長恨夢)》(26)을, 조선키네마사가 《농중조(籠中鳥)》(26)를 내놓았다.

이렇듯 20년대 초반기에 활기를 띤 한국영화가 《춘향전》 《장화홍련전》 《운영전(雲英傳)》 《심청전》 등 한국의 고전작품에서 그 제재(題材)를 찾았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광수(李光洙) 원작의 《개척자》가 초기 계몽주의(啓蒙主義) 작품으로 제작된 것도 뜻깊은 일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한국영화에서 대체로 개화기 신파물(新派物)이나 모방 번안물 등 가 범람한 것도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농중조》 《장한몽》과 같은 작품이 구습타파(舊習打破)와 자유연애사상의 고취 등 계몽주의의 선봉에 섰다는 점은 이 시대의 영화다운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년대의 한국영화를 통해 가장 중요하고도 빛나는 업적은 일련의 민족영화가 대두하였다는 사실이다. 26년 나운규(羅雲奎)는 기념비적인 작품 《아리랑》을 만들어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의 혹독한 강점 시대였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바로 이와 같은 겨레의 항일 저항정신을 집약적으로 반영한 작품이었다. 한국의 민중은 이 작품에 열광하여 나라 잃은 겨레의 울분을 풀었으며, 《아리랑》은 마치 애국가처럼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아리랑》 이후 그는 10년간의 시나리오 작가 ·감독 ·배우 활동 등을 통해 강렬한 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도록 그 전통적 흐름의 초석을 이룬다.

나운규는 《아리랑》 이후 《풍운아(風雲兒)》(26) 《들쥐》 《사랑을 찾아서》(28) 《벙어리 삼룡(三龍)》(29) 등 일련의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화미학상으로는 사실적인 작풍을 확립하여 초기 한국영화의 격조높은 작품세계를 제시하였다.

이어서 계몽주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심훈(沈熏)이 각본을 쓰고 직접 감독한 《먼동이 틀 때》(27)를 발표해 한국영화의 사실적이며 저항적인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이후 이와 같은 항일 저항적인 민족주의의 작품경향은 줄곧 일제강점기하 한국영화의 뿌리깊은 체질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영화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은 작품에 대한 무자비한 검열과 고등경찰을 통한 인신구속 등 갖은 방법으로 더욱 극심해졌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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