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여우

[ actress , 女優 ]

요약 연극무대 ·영화 등에 출연하는 여성 연기자.

여배우의 준말이다. 부문에 따라 무대(연극)여우, 영화여우 등으로 부르며, 이보다 뒤에 등장한 텔레비전의 여성탤런트도 여우의 범주에 속한다. 연기자로서 여우의 특성은 남우에 비해 감각적 ·관능적 미감(美感)의 표출이 강하다는 점이다. 특히 여성의 자태와 음성에 의한 에로티시즘의 발산은 여우의 예술적 매력을 지탱해주는 근본적 요소 중 하나이다. 여우의 발생은 동 ·서 모두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녔으나 예술가로 인정을 받고 사회적 지위가 안정된 것은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현대적 의미의 여우 범주에 들어갈 만한 여성 연예인은 서양에서도 고대로부터 존재하였으나 주로 종교적 금기(禁忌) 때문에 그리스 로마시대 ·중세를 통하여 사회적 지위는 극히 낮았고 공인된 무대에서는 여우가 등장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극에서조차 여자역은 소년배우가 대신하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종교의 속박이 풀리고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게 됨에 따라 여우의 등장이 촉진되어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콤메디아 델라르테를 선두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의 여자역은 여배우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근대 초 영국의 엘렌 테리(1848∼1928) 및 사라 시돈스 부인(1755∼1831), 프랑스의 사라 베르나르(1844∼1923) 이탈리아의 엘레오노라 두제(1859∼1924) 등이 대표적인 무대여우로 명성을 떨쳤다. 20세기 초 사라 베르나르가 남자인 햄릿 역을 맡아 격찬을 받은 예나 남우가 여성역을 맡아 뛰어난 표현력을 발휘하는 예도 있으나, 성(性)을 달리한 연기자에 의한 역의 표현에는 결함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우아함 ·가련함 ·애절함 등 여성의 미와 정감은 여우에 의해서만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어 여자역을 남우가 대역하던 중세보다는 합리주의 ·사실주의를 기조(基調)로 하는 근세 및 근대에서 여우는 예술적 ·사회적 위치를 확립하였다.

한국에서 여우의 부류는 여성연희자(演戱者)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최초의 원형은 “노래와 춤이 신을 즐기게 함[歌舞娛神]에서 사람을 즐기게 하는[歌舞娛人] 연극으로 발전하였다”는 원시종합예술체의 이론과 같이 신에게 치성 드리는 의식을 주제하고, 스스로 노래와 춤을 추는 ‘굿’을 연출하던 무녀에서 볼 수 있다. 대중 앞에 재주를 보여 주는 여성 연희자의 기능은 제천(祭天) ·무천(舞天) 등 숱한 고대의 제의(祭儀)와 같이 ‘신에게 굿을 바친다[供演]’는 연극적 요소보다 가무적 요소가 오래 남아 제약을 받아오다가 차차 가무백희(歌舞百戱) ·나례(儺禮) ·산대잡극(山臺雜劇) 등의 연희 형식이 갖추어지면서 줄거리를 전달하고 내용을 표현하는 연기자로서의 틀이 잡혔다. 이로부터 우인(優人) ·창우(倡優) ·유기(遊妓) ·여기(女妓)와 같은 직업적인 배우 속에 끼게 된 여성 연희자가 나타났다. 최하층 천민출신이던 이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걸립(乞粒)으로 유랑생활을 하고 사회악의 원천이라 해서 부정적인 존재로 대우를 받았다. 표면으로는 연희를 하고 내면으로는 매음으로써 생활수단을 강구하였던 여성 연희자 무리들 때문이었다. 1902년(광무 6) 한국 최초의 극장 원각사(圓覺社)가 세워짐으로써 이 때 뽑힌 여령(女伶)이라는 여성 연희자는 처음으로 극장이라는 옥내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 후 창극이 창시되면서 여성 연희자는 창과 연극을 연출하는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0년 초 ‘혁신단’ 등 신파단체가 많이 생긴 후에도 여역(女役)은 남자가 맡는 것이 통례였는데, 17년 조직된 개량단(改良團)에 김소진(金小珍)이 등장함으로써 현대적 개념과 걸맞는 여배우가 탄생하였다. 이 후 20년대 초 신극의 ‘토월회’에 이채전(李彩田) ·복혜숙(卜惠淑) ·석금성(石金星) ·윤심덕(尹心悳) 등이 연극여우로 등장하였다. 23년 영화 《춘향전》에 기생출신의 한용(韓龍)이 춘향역을 맡음으로써 최초의 영화여우가 등장하였고 이월화(李月華) ·복혜숙 ·신일선(申一仙) ·김연실(金蓮實) ·문예봉(文藝峰) ·김명순(金明淳) ·노재신(盧載信) ·김신재(金信哉) 등이 개화기 무성영화시대의 여우로서 활약하여 사회적 반응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