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

원각사

[ 圓覺社 ]

요약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
구분 국립극장
설립일 1908년
설립목적 연극 상연 전문 극장
주요활동/업무 신극상연
소재지 서울

한국 신극운동의 요람으로 1908년 창설되었으며, 그해 11월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으로 신극화하여 상연하였다. 원각사 건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두현(李杜鉉)은 그의 《한국 신극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2년까지 국내에는 연극을 전문적으로 상연할 극장이 없었는데 1902년 정부에서 고종(高宗)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경예식장(稱慶禮式場)으로 봉상사(奉常寺) 구내(지금의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극장을 본떠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회장소를 짓고 지금의 극장 명칭에 해당하는 ‘희대(戱臺)’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원각사의 전신이다.

그해 8월부터 칭경예식을 위한 준비로 협률사(協律司)라는 관청을 두어 기녀(妓女)들을 뽑아 연희(演戱)를 교습시켰다. 9월 17일로 예정된 칭경예식이 콜레라의 만연과 영친왕(英親王)의 두진(痘疹)으로 가을로 연기되자 그 동안 가무를 연습했던 사람들은 ‘협률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녀 ·삼패(三牌) ·광대(廣大) 등을 모집하여 희대에서 가무의 공연과 활동사진 상영 등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협률사의 활동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하여 1906년 고종의 명으로 협률사를 혁파(革罷)하고 건물은 1907년 2월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 전용건물로 사용하였다.

협률사가 사설단체로 궁내부 관할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 건물은 계속 극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908년 1월 하순,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그해 7월 이인직이 이 건물에 원각사를 개설하면서부터 이 건물을 원각사극장이라 부르게 되었고 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고정되었다. 이리하여 궁내부에서 직할하는 국립극장이 된 원각사에서는 처음 2개월 간은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華容道)》 등 판소리를 주로 상연하다가 11월 15일 《은세계》를 상연하였는데 당시 신연극이란 이름 아래 상연된 한국 신연극의 효시였다. 그러나 이 최초의 신연극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원각사는 한때 휴연(休演), 1909년 5∼6월에 이인직이 일본 연극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그곳 연극을 답습한 후 《천인봉(千仞峯)》 등의 새 극본을 상연하려 했으나 실행치 못하고 《춘향가》를 공연하였으며 다시 일본에 다녀와서 《수궁가》를 공연하였다. 그 이후 국민회 본부사무소로 사용되고 1909년 11월에 폐지되었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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