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극

한국의 연극

봉산탈춤

봉산탈춤

한국 연극의 기원을 고대의 제의(祭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연극의 기원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삼국시대의 고대연극은 서역악(西域樂)의 영향 아래 발전한 고구려악(高句麗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 및 오기(五伎) 등이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통합한 것으로서 음악 ·무용 및 연극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연희로서 대표될 수 있고, 이미 거기에는 대륙 전래(傳來)의 요소와 토착적 요소의 상호교섭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전승(傳承)이 옳지 못했던 탓이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그 원형을 짐작케 하는 것은 가면무극(假面舞劇)으로서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에 연희된 처용무뿐이다.

고려시대의 연극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 등의 국가적 행사에서 연원하여 의식과 오락의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된 산디놀음과 백희(百戱)를 들 수 있는데, 산디란 상당한 규모의 장식적인 무대를 지칭한다. 한편, 탈(가면)을 쓰고 주문을 외면서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행사인 나례 역시 연극과 깊이 관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다 화극적(話劇的) 요소인 조희(調戱)까지 생각해 본다면 고려연극의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재인(才人) ·광대(廣大) 등 전통적으로 배우와 그 부류를 지칭하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산디놀음과 나례는 성행하였고 조정에는 사신 영접과 공의(公儀) 등을 위한 산대도감(山臺都監)까지 둔 일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 폐지되었으며 현존하는 산디놀음 계통의 연희는 그것이 서민들에게 넘어간 이후의 가면극들이다.

즉, 그것은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봉산(鳳山)탈춤, 경남 일대의 오광대(五廣大) ·야류(野遊) 등 민속적인 가면극의 여러 형태로 남게 되었다고 본다. 다만 여기에는 산디로 간 계통과 별개로 농경의례 ·무속(巫俗)놀이 ·서낭제 등 순수한 민속적 성격의 전승요소가 짙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나 그 경로는 어느 것이든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슷하게 연극적 요소(특히 서사적 성격)가 많은 판소리도 그 성립 경위는 뚜렷하지 않다. 이 밖에 사당패 등 유랑예인(流浪藝人) 집단에 의한 꼭두각시놀음(인형극)이 명맥을 유지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전통연극의 여러 형태는 조선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문화의 도입과 함께 신연극(新演劇)이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1908년의 원각사(圓覺社) 개설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신연극이 서구 근대극의 영향 아래 어느만큼 정착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였다. 신연극의 형식을 일본에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신파(新派)’라는 대중적 전시대(前時代) 연극이 먼저 자리를 잡고(1910년대), 그 뒤에야 비로소 ‘신극(新劇)’이 도입될 수 있었다. 그 시기를 대체로 토월회(土月會) 창설(1923)로 보며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의 발족(31) 이후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한 통설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직업적 대중극단이 ‘고등신파(高等新派)’라는 이름 아래 연극의 대중적 기반을 넓힌 것은 신극운동의 실천가가 주로 서구극 도입을 통해 연극의식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데 열중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가혹한 문화탄압은 연극을 어용화(御用化)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8 ·15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한국연극은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연극은 6 ·25전쟁까지의 좌우대립에서 빚어진 혼란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50년대에 겨우 발전의 실마리를 잡고 극단 ‘신협(新協)’이 중심이 된 재건 ·정비기를 맞이하였다. 60년 이후 재능 있는 신인들의 참여를 얻어 세대교체를 실현한 한국연극은 극단활동 ·극장시설 ·극작가 배출 ·비평활동 ·인재양성 등 여러 면에서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역참조항목

강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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