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률사

협률사

[ 協律社 ]

요약 조선 후기 창악인(唱樂人)들이 조직한 예술단체.
구분 예술단체
설립일 조선 후기
주요활동/업무 판소리 ·줄타기 ·가무음곡 ·재담 ·농악 등 공연
소재지 서울

발생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없으며 다만 판소리 연구가인 박황(朴晃)이나 한말의 명창인 송만갑(宋萬甲) ·(李東伯) 등에 의하면, 협률사라는 이름은 1902년( 2)에 설립된 희대(戯臺:舞臺)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며, 1860년을 전후하여 판소리의 명창들이 중국 청(淸)나라의 협률창희(協律唱戯)에서 따온 것으로 주장한다. 이 단체에서 상연한 내용은 주로 판소리 ·줄타기 ·가무음곡 ·재담 ·농악 등의 연예물로서 창극은 상연되지 않았다.

이처럼 창악인들의 연예활동이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자연히 대중의 연희(演戯)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정부에서도 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1902년 의 어극사십년 칭경례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을 대대적으로 가질 계획을 세우고, 고종의 칙허를 얻어 희대를 만드는 한편 이를 관장하는 협률사(協律司)를 두게 되었다.

협률사에서는 가무녀(歌舞女)를 조직했고 한편 고종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金唱煥) ·송만갑 등은 전국의 명인(名人) ·명창(名唱)을 서울로 모았는데, 그 수가 17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연예계에 처음으로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가 했으나 그 해의 콜레라 만연에 이은 농산물의 흉작, 그리고 일본 ·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문제로 이러한 꿈은 사라지고 협률사(協律司)도 협률사(協律社)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1903년에는 경영권도 정부에서 민간의 손으로 넘어가 사설극장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예술단체인 협률사가 연희하던 희대도 똑같이 협률사로 부르게 된 듯하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일컬어진다. 이후 협률사는 공연장의 풍기문제 등의 이유로 1906년 정부로부터 폐지령을 받았고 따라서 예술단체의 활동도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벌써 서양의 새로운 문물 바람이 점차 일면서 개방적이 되어 갔고 연희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 극장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되어 1908년을 전후해서는 (圓覺社)를 비롯하여 (光武臺) ·(團成社) 등의 연극전용극장이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생겨났다.

이해 (李人稙) 등이 중심이 되어 협률사를 연희장(演戯場)으로 다시 사용하도록 정부의 인가를 얻어 이름도 원각사로 바꾸었다. 앞에서 말한 원각사는 바로 이 원각사를 일컬으며 새롭게 단장한 원각사는 주로 신극만을 상연하였고 이에 생업에 위협을 받게 된 전속 창극단체이던 협률사는 지방 순업(地方巡業)으로 전락하여 해산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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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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