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Stele for State Preceptor Woneung at Unmunsa Temple, Cheongdo , 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

요약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에 있는 고려시대 탑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와 비각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와 비각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94-12번지 운문사
시대 고려시대
종류/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크기 높이 2.28m, 너비 1.8m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원응국사(圓鷹國師) 학일(學一)의 탑비(塔碑)이다. 탑비(부도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승(高僧)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세웠다. 비석의 일부가 훼손되어 탑비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원응국사가 입적한 1144년(고려 인종 22)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응국사 학일

학일(學一)은 1052년(고려 문종 6)에 태어나 1144년에 입적한 고려시대 승려이다. 11세에 출가하여,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혜함(惠含)의 밑에서 불법(佛法)을 배웠다. 1085년(고려 선종 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1099년(고려 숙종 4) 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 1106년(고려 예종 1)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와 구산사(龜山寺) 주지를 맡았으며, 1108년 선사(禪師)가 되어 1013년(고려 현종 4) 내제석원(內帝釋院) 주지를 지냈고, 이듬해 대선사(大禪師)의 자리에 올랐다. 1122년(고려 예종 17) 예종의 왕사(王師)로 임명되었으나, 책례(册禮)를 올리기 전에 왕이 돌아가자, 인종이 선왕의 뜻을 이어 왕사로 삼았다. 1129년(인종 7) 은퇴하여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1144년 학일이 운문사에서 입적하자, 인종은 학일을 불교에서 최고 법계(法階)인 국사(國師)로 추증(追贈: 죽은 뒤에 품계를 올려 주는 일)하고, '원응(圓鷹)'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탑비의 구성과 양식

귀부와 이수는 유실되었고 현재 비신만이 남아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30cm, 너비 91cm이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본문 이미지 1

비신(碑身)의 앞면에는 학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운문사의 승려와 학일의 제자들을 열거하였다. 당대 명문가였던 윤언이(尹彦頤)가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행서체(行書體)를 바탕으로 쓰였다. 비석의 상단에는 ‘圓應國師碑銘(원응국사비명)’라는 제액(題額: 비석의 명칭이나 비석의 주인공을 새긴 부분)이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다.

가치 및 의의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는 고려시대 국사로 추대되었던 원응국사 학일의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학일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제도, 불교 문화 등에 대한 정보도 포함하고 있어 역사학·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비석에 쓰인 글자는 금석학·서예학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조항목

운문사, 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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