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

왕사

[ 王師 ]

요약 불교를 국교화했던 고려 시대에 임금의 스승 역할을 하였던 고승(高僧).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도 불교를 왕성하게 할 것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왕사제도를 처음으로 채택하였다. 왕사를 둔 것은, 왕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행하기 위한 것과, 대부분의 백성이 불교를 신앙하였으므로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고승을 왕의 스승으로 임명함으로써 고려의 숭불적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왕사를 선정하기 위하여, 왕은 최고를 법계를 가진 고승을 상부(相府)에 자문하거나 왕이 직접 고승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무신집권 기에는 무신 실권자가 선정하기도 하였다. 고승이 선정되면 먼저 칙서를 가진 대신을 사찰로 파견하여 왕사 책봉을 수락할 것을 청하는 서신지례(書紳之禮)를 가진다. 고승은 이를 세 번 사양하는 예를 갖추고, 왕도 세 번 청한다. 이때 왕의 간곡한 청을 찬앙지정(讚仰之情)이라 하고, 고승의 세 번 사양하는 예를 삼반지례(三反之禮)라고 한다. 고승은 사양하다가 사양표(辭讓表)를 그치고, 왕은 왕사의 의장(儀仗) 물품을 보내어 개경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고승은 하사받은 가사(袈裟) 및 장신구를 갖추고 하산례를 행한 후, 개경에 있는 대사찰에 부임하였다. 그 후 왕은 고승에게 제자의 예를 행한다. 왕은 태조의 영당(影堂)이 있는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면복을 갖추고 고승을 상좌에 앉힌 뒤 그 아래에서 예를 취하였다. 이때 고승은 상좌에 앉는 것을 사양하는 데, 이를 피석지의(避席之儀)라고 한다. 그리고 왕은 고승에게 왕사에 책봉하는 조서를 내렸다. 왕사는 모든 승려들로부터는 물론 백성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왕사가 죽으면 왕은 크게 애도하고, 국가에서는 3일 동안 모든 공무를 중단하고 조회를 폐함으로써 온 나라가 조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추모비를 세워 그 덕을 기리고, 대부분 국사(國師)의 존호를 추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사는 시대에 따라 주도적인 종파 가운데서 선임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기에는 선종출신이 많이 선출되었고, 헌종에서 예종 때까지는 화엄종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인종 이후 강종 때까지는 선종과 천태종에서 많이 피선되었고, 그 후 후기에는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白蓮社) 출신의 고승들이 많이 책봉되었다. 충선왕 이후에는 친원세력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종파간의 이해 갈등이 발생하여 왕사 책봉에 큰 혼선이 일어났다.

고려말 혼란기에 신진 사대부들은 불교계의 부패를 비판하였고, 국사 왕사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조선 건국 뒤에는 배불정책과 유교정치를 강조하여 왕사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인 1395년(태조 4)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사로 책봉되었으며, 이후는 완전 종지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모두 27명의 왕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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