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집

움집

[ 竪穴住居(수혈주거) ]

요약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반지하 가옥. 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워 이엉을 덮어 만들었다. 바닥은 대개 진흙을 깔고 움집 안에는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을 설치했다. 후기로 갈수록 지상가옥에 가까워지며 화로나 저장 구덩과 같은 시설이 밖으로 돌출시킨 감실(龕室)에 설치되고 있다.
움집의 구조

움집의 구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로는 자연 동굴이나 인공 동굴도 없지는 않았지만, 움집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움집은 대체로 원형이거나 원형에 가까운 사각형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워 비바람을 막기 위한 이엉을 덮어 만들었다. 크기는 직경이 약 6m 정도이고, 깊이는 30~70cm 정도였다. 움집의 바닥은 대개 진흙을 깔고 다져 놓았다.

움집 본문 이미지 1

움집의 중심부에는 취사와 난방을 하기 위한 화덕[爐]을 설치했다. 이 화덕 옆에는 저장 구덩[貯藏穴]이 있는데, 취사를 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여기에 보관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저장 구덩이 다른 곳에 하나 더 발견되는 움집도 있다. 출입구는 대체로 동남쪽이나 서남쪽의 햇볕을 잘 받는 방향에 설치되었다.

남자들이 출입구 근처에서 간단한 석기(石器)를 만드는 등의 작업을 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출입구 반대쪽 깊숙한 곳에서 취사 등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후기로 가면 움집은 안의 공간이 약간 넓어지고 평면 모양의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며, 화덕은 가운데가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서 설치되었다. 움집 안에서의 생활이 다양해지면서 주거지로서의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작업장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도 신석기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움집에서 살았다. 움집의 구조는 둥근 모양의 것이 점차 자취를 감추는 대신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직사각형 움집이 주류를 이루었다. 깊이는 보통 50cm 안팎이었지만, 30cm 정도로 얕은 것도 있어서 점차 지상가옥에 가까워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큰 움집은 80㎥인 반면에 아주 작은 것은 10㎥보다 작은 것도 있어서 한결같지는 않지만, 20㎥ 정도 되는 것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정도가 당시 움집의 표준형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큰 움집의 경우 화덕을 두 개나 만들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깊숙한 곳에 토기(土器)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의 활동처인 것으로 생각되며, 출입구 가까이에는 야외 활동을 위한 도구들이 놓여져 있는 점으로 보아 남성들의 생활 공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움집 안쪽에 놓여 있던 화로나 저장 구덩과 같은 시설이 점차 움집 한쪽 벽에서 밖으로 돌출시킨 감실(龕室) 같은 곳에 설치되고 있었다. 아마도 움집 내부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한편 움집 내부의 공간이 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칸막이를 설치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주택의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한 하다. 또한 움집에 지붕을 씌우기 위한 기둥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멍을 뚫어 세우는 방법 외에도 원시적인 초석(礎石)을 이용하여 그 위에 세우는 새로운 방법도 고안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비해서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농경생활의 영향으로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움집이 밀집화되고, 또한 광역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취락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가운데에는 이전과는 달리 화재로 인하여 폐허화된 것이 많다. 이는 화덕이 두 개로 늘어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사용 빈도가 높아짐에 따른 부주의로 인한 실화(失火)가 많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사이의 이해관계에 얽힌 분쟁이나 정복전쟁으로 말미암아 불타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