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세죽리 유적

영변 세죽리 유적

[ 寧邊細竹里遺蹟 ]

요약 평북 영변군 오리면(梧里面) 세죽리에 위치한 신석기시대~초기철기시대의 집터[住居址] 유적.

영변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청천강의 오른쪽 기슭에 있다. 1961년 홍수로 유물층이 노출되어, 1962년과 1963년 2차에 걸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유적 맨 위층이 초기철기시대 문화층, 중간층이 청동기시대 문화층, 맨 밑층이 신석기시대 문화층으로 형성되었으며, 세 시대의 문화층에서 모두 27기의 움집터[竪穴住居址]가 조사되었다. 신석기시대층에서는 동서로 긴 장방형 움집터 1기가 나타났는데, 점토를 펴 다진 바닥 중앙부에서는 강돌로 테를 돌려 만든 화덕자리[爐址]가 있으며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갈돌[碾石] ·석제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층에서는 3개의 집터가 드러났는데, 집터들의 평면은 모두 방형이고 크기는 12m 정도로, 크기나 평면윤곽이 요동반도에 있는 쌍타자 유적 제3기의 집터와 비슷하다. 집터 바닥의 북벽 중심에 설치된 화덕에 돌을 네모나게 돌려놓았으나 북쪽이 열린 것은 이 집터들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방안에는 기둥구멍은 없었으나 27호 집터를 보면, 움벽가를 돌아가면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고깔 모양의 우진각지붕을 씌웠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죽리유적에서는 동서 1~1.3km, 남북 200~300m의 넓은 범위에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2세기)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그 일부에서 집터 5개를 확인하였는데, 움집이 아니라 지상가옥이고, 주춧돌이나 기와는 없었으며, 그 대신 지붕이 무너져 내려앉은 것으로 보이는 불에 탄 나무와 짚이 있었다. 즉 주춧돌 없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짚같은 것으로 지붕을 한 초가집으로 추정되었다.

집터들은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서 보통 30m 미만의 크기였으며 10m 미만의 작은 것도 있었다. 특히 2개의 집터에서는 구들이 드러났는데,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외곬구들이었다. 돌을 두줄 평행으로 세워 구들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구들장을 놓았던 것이 깨어져 흩어져 있었으며, 그 안에서 철기 및 그 조각과 질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구들 시설은 푸순[撫順] 연화보(蓮花堡)유적의 집터에도 있었던 형태이다. 집터 안팎에는 쇠로 만든 호미 ·괭이 ·낫 ·도끼 ·끌 ·손칼 ·화살촉뿌리 ·비수 등과 청동으로 만든 화살촉 ·칼자루 끝장식과 명도전(明刀錢) ·포전(佈錢) 등의 화폐, 회색의 노끈무늬그릇, 바탕흙에 활석 가루를 섞은 황백색의 새끼줄무늬그릇들, 유리귀구슬 등의 치레거리, 흙 그물추 ·흙가락바퀴, 돌거푸집, 검자루맞추개돌 등 흙 또는 돌로 만든 유물들이 많이 널려 있었다. 이것은 기원전 5~4세기의 좁은 놋단검 관계 유적에서 드러난 질그릇과 같다. 특히 구들 시설이 드러난 30호 집터에서는 명도전 무더기가 집터 동남쪽 모서리 바깥에 집터 바닥보다 깊이 묻혀 있었다.

명도전은 50개씩 묶은 것을 2,000여 개나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것으로서, 네모난 상자에 넣어둔 것처럼 묻혀 있었다. 철기 및 명도전, 나아가서 구들시설 등에서 보듯이 세죽리유적에서 알려진 일련의 자료들은 이 지역에 중심을 가진 고조선 주민들이 앞선 시기의 문화를 이어받아 그를 더욱 발전시켜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조항목

움집, 영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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