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 Stele of Buddhist Monk Jingyeong from Bongnimsa Temple Site, Changwon ,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

요약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후삼국시대 탑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복궁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경복궁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시대 후삼국시대
종류/분류 탑비
크기 전체 높이 3.37m, 비신 높이 1.71m, 비신 너비 0.99m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신라의 승려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탑비(塔碑)이다. 탑비(부도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승(高僧)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승탑(부도)과 함께 세워졌다. 비문에 적힌 기록을 통해 심희가 입적한 923년(신라 경명왕 7)으로부터 1년 후인 924년(신라 경명왕 8)에 세워졌고, 1797년(정조 21)에 중수(重修)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창원 봉림사지에 있었으나,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전시되고 있다. 

진경대사 심희

심희(審希)는 855년(신라 문성왕 17)에 태어나 923년에 입적한 신라의 승려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開創)하였다. 9세에 출가하여 고달사(高達寺)의 현욱(玄昱)의 밑에서 불법(佛法)을 배웠으며, 873년(신라 경문왕 13)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이후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며 좌선(坐禪)에 몰두하였는데, 심희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진성여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의 지원을 받아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선풍(禪風)을 선양(宣揚)하였다. 918년(신라 경명왕 2) 왕의 청으로 궁궐에 들어갔고, 경명왕은 심희에게 사자(師資)의 예를 표하고 설법을 청하였다. 설법이 끝난 뒤 왕은 심희에게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호(號)를 하사하였다. 923년 심희가 입적하자, 경명왕은 심희에게 '진경(眞鏡)'이라는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렷다. 

탑비의 구성과 양식

귀부·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석의 전체 높이는 3.37m이고, 이 중 비신의 높이는 1.71m, 너비는 99cm이다.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로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귀부의 얼굴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묘사되었으며, 머리 위에는 뿔을 꽂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다. 등에는 육각형 모양의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져 있고, 비좌(碑座: 비신을 꽂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의 각 면에는 구름 문양를 새기고 상단에는 연꽃 문양을 배치하여 꾸몄다. 

비신(碑身)은 탑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심희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경명왕이 직접 비문을 지었으며, 심희의 제자 행기(幸期)가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楷書體)를 따라 글씨를 썼다. 비신의 아랫 부분이 절단되어 원래의 글자가 인멸되었으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려 있는 비문 기록을 참고하여 복원해 놓았다. 

이수(螭首)는 탑비의 머리 부분으로 장식적인 역할과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수의 앞면 중앙에 위치한 제액(題額)에는 '故眞鏡大師碑(고진경대사비)’라는 글씨가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져 있으며, 제액을 중심으로 용·구름 등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이수를 장식했다.

가치 및 의의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의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심희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제도, 불교문화 등에 대한 기록도 포함하고 있어 역사학·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비석에 쓰인 글자는 금석학, 서예학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귀부와 이수의 화려한 조각 장식은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역참조항목

봉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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