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왕

문성왕

[ 文聖王 ]

요약 신라의 제46대 왕(재위 839∼857).
경주 문성왕릉

경주 문성왕릉

출생-사망 ? ~ 857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839년∼857년
본명 경응(慶膺)
시대 남북국시대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金), 이름은 경응(慶膺), 시호는 문성(文聖)이다. 신라의 제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불리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842년(문성왕 4) 이찬(伊湌) 위흔(魏昕)의 딸을 비로 맞이해 왕자를 낳아 847년(문성왕 9) 태자로 봉했다. 그러나 태자는 852년(문성왕 14)에 일찍 죽었다. 이 밖에 제56대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고조부인 김안(金安)이 문성왕의 왕자로 알려져 있으나 누구의 소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왕비가 소명왕후(炤明王后)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성왕은 아버지인 신무왕이 장보고(張保皐)의 도움으로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839년 음력 4월에 태자로 봉해졌다. 그리고 그 해 음력 7월 23일에 신무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임명했으며, 840년(문성왕 2)에는 김예징(金禮徵)을 상대등으로, 김의종(金義琮)을 시중으로, 김양순(金良順)을 이찬(伊湌)으로 삼았다. 843년(문성왕 5)에는 김의종이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김양순을 시중으로 삼았고, 844년(문성왕 6)에는 자리에서 물러난 김양순을 대신해 대아찬(大阿湌) 김여(金茹)를 시중으로 임명했다. 이 해에 혈구진(穴口鎭, 지금의 강화도)을 설치하고, 아찬(阿湌) 계홍(啓弘)을 진두(鎭頭)로 임명했다. 847년(문성왕 9)에는 김여가 죽자 왕비의 아버지인 이찬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고, 848년(문성왕 10)에는 위흔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파진찬(波珍湌) 김계명(金啓明)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849년(문성왕 11)에는 김예징이 죽자 이찬 의정(義正)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852년(문성왕 14)에는 파진찬 진량(眞亮)을 웅주(熊州) 도독(都督)으로 임명했다.

문성왕 때에는 민애왕 때의 전란으로 파괴된 왕궁의 보수도 이루어졌다. 847년(문성왕 9)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하였고, 852년(문성왕 14)에는 명학루(鳴鶴樓)를 중수하였다.

신라 하대의 왕으로서는 비교적 오래 왕위에 있었으나, 그의 재위 기간에도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841년(문성왕 3)에는 일길찬(一吉湌) 홍필(弘弼)이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자 섬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845년에는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846년 장보고가 청해진 웅거하며 반기를 들자 무주 사람인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살해했다. 847년에는 시중을 지낸 김양순이 파진찬 흥종(興宗)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처형되었고, 849년에는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고 대아찬 흔린(昕鄰) 등이 이와 연루되어 처벌되었다. 문성왕은 851년(문성왕 13)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으로 이주시켰다.

관청에서 화재도 자주 발생했는데, 이것도 문성왕 때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준다. 852년 공물(貢物)과 부역(賦役)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조부(調府)에 불이 났으며, 855년(문성왕 17)에는 왕실의 보물들을 보관하는 진각성(珍閣省)이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삼국사기》에는 문성왕 때에 천재지변도 자주 나타났다고 나온다. 왕위에 오른 직후인 840년 음력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겨울에 기근이 심했으며, 이듬해에는 금성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843년에는 신궁(神宮)의 정원에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들어왔으며, 이듬해 음력 3월에는 금성에 우박이 내렸다. 848년에는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850년에는 큰 나무가 뽑혀나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851년에는 음력 4월에 서리가 내렸으며, 853년 여름에는 홍수가 났고 가을에는 서남 지방에 메뚜기 떼가 창궐해 곡식에 큰 피해를 입었다. 문성왕은 이듬해 정월에 서남 지방으로 사신을 보내 백성을 위문했다. 《삼국유사》에는 839년 음력 5월 19일에 눈이 많이 내렸으며, 음력 8월 1일에는 천지가 캄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성왕 때에도 신라는 당나라와 가까운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840년 당나라 문종(文宗, 재위 826~840)은 억류해 두던 왕족이나 기한이 된 유학생 등 105명을 신라로 돌려보냈으며, 841년 당나라 무종(武宗, 재위 840~846)은 신라 출신으로 연주도독부사마(州都督府司馬) 등을 지낸 김운경(金雲卿)을 치주장사(淄州長史)로 임명해 신라로 사신으로 보냈다. 851년에는 아찬 원홍(元弘)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왔는데, 문성왕은 직접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857년 음력 9월에 병이 들자 부친 신무왕의 이복동생인 서불한(舒弗邯) 김의정(金誼靖)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 7일 뒤에 사망했으며 공작지(孔雀趾)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경주 문성왕릉은 사적 제5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성왕이 죽은 뒤 숙부인 김의정이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0)으로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 본문 이미지 1 


신무왕정종왕후(정계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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