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베드로

[ Peter the Apostle ]

요약 예수의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중심적 지도자이다.
베드로

베드로

출생-사망 ? ~ AD 64 ?
본명 시몬(Simon)
별칭 케파, 시몬 바르요나, 시몬 베드로
활동분야 종교(그리스도교)

본명은 시몬(Simon)이며 시므온(Simeon)이라고도 한다. 베드로(Petros)라는 이름은 '돌, 바위'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트라(petra)에서 비롯되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그가 “살아 계신 하느님(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가 “너는 베드로(Petros)이다. 내가 이 바위(petra)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며 이름을 바꿔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르코복음서〉와 〈루카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대답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마르 8:30, 루카 9:21). 또한 〈요한복음서〉에는 시몬이 동생인 안드레아(Andreas)를 따라 예수를 처음 만나러갔을 때 예수가 그를 눈여겨보고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람어로 ‘돌, 바위’를 뜻하는 ‘케파(kepha)’를 그리스어로 옮기면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베드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케파, 시몬, 시몬 베드로, 시몬 바르요나(요나의 아들 시몬), 요한의 아들 시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베드로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서로 다르지만, 이 이름이 반석(盤石)이나 바위를 뜻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베드로는 요르단 강 북동쪽의 어촌 베싸이다(Bethsaida) 출신으로 사도 안드레아와는 형제 사이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복음서에 따라 요나(Jonah)나 요한(Johan)으로 다르게 전해진다. 공관복음서에 예수가 베드로의 집으로 갔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고쳐주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마태 8:14-15, 마르 1:29-31, 루카 4:38-39). 하지만 아내와 자식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된 과정에 대한 기록도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마태오복음서〉와 〈마르코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어부 출신으로 갈릴리(Galilee) 호수에서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물고기를 잡고 있다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20, 마르 1:16-18)는 예수의 말을 듣고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복음서〉에는 예수가 겐네사렛(Gennesaret) 호수에서 베드로의 배를 타고 설교를 하면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4명의 어부가 한꺼번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5:1-11). 하지만 〈요한복음서〉에는 예수가 요르단 강 건너편의 베타니아(Bethanya)로 세례 요한을 찾아갔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예수를 먼저 따랐고, 그가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가 제자가 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된 장소와 계기 등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가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가 맨 처음 받아들인 제자라는 점만은 다르지 않다.

예수의 제자로서의 베드로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는 베드로가 예수의 12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마태오복음서〉에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베드로와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로 쓰여 왔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렇게 직접 베드로의 수위권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언급해 제자들 사이에서 그가 지닌 지도적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열두 사도를 뽑은 일을 기록할 때에도 베드로의 이름이 맨 앞에 등장하며(마태 10: 1-4, 마르 3:13-19, 루카 6:12-16), 제자들이 ‘시몬과 그 일행’(마르 1:36)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베드로의 지도적 위치는 예수가 죽은 뒤에도 유지되었다. 비유대계 신자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적용하는 문제를 놓고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뒤에 사도 바울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갈라 2:7-8)라고 적었다. 이는 예수가 죽은 뒤 베드로가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들에는 베드로가 보인 인간적인 약점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복음서〉와 〈마르코복음서〉에는 예수가 수난과 부활에 관해 예고했을 때 베드로가 이를 반박하다가 예수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꾸짖음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마태 16:21-23, 마르 8:31-33).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가 유대교 대사제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카 22:54-62, 요한 18:15-27).

예수의 죽음 이후의 베드로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사도들의 회의를 주재해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를 대신해 마티아(Matthias)를 사도로 임명했으며(사도 1:15~26), 오순절의 설교로 교인들의 수를 크게 늘렸다(사도 2:14-41). 사도들 가운데 처음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을 행했고(사도 3:1-10), 사마리아(사도 8:14~25)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사도 9:32-43)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 코르넬리우스(Cornelius)를 개종시켜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였다(사도 10:1-48). 당시 베드로는 할례를 해야 개종을 받아들였던 전통적인 유대교의 관습을 무시하고 세례만으로 코르넬리우스를 개종시켰고, 이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틀을 넘어서 비유대인들에게도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 베드로는 기원후 44년에 정통 유대교 정책을 추진하던 헤롯 아그리파 1세(Herod Agrippa I)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베드로는 파스카 축제가 끝난 뒤 처형될 상황에 놓였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사도 12:1-19). 그 뒤 49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회의를 주재해 비유대계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사도 15:1-31).

그 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전승에서는 베드로가 로마로 가서 교회를 세워 초대 주교가 되었으며, 네로 황제 때인 64년 무렵에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 등장하는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베드로전서 5:13)라는 구절에서 바빌론이 로마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3대 로마 주교인 클레멘스 1세(Clemens I)는 〈코린토스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많은 고문과 끔찍한 일을 당하고, 우리들 가운데 모범이 된 수많은 선택받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이야기는 1세기 말부터 널리 퍼져 있었는데, 2세기 말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베드로 행전〉은 로마에서의 베드로의 활동과 순교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당시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Agrippa)로 부터 박해를 받은 베드로는 신도들의 권유에 따라 로마를 떠났는데, 길을 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예수를 만났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4세기에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쓴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는 베드로가 로마로 와서 마르코에게 구전되던 교리들을 기록으로 정리하게 해서 〈마르코복음서〉가 작성되었으며, 베드로의 재가로 이 복음서가 교회 안에서 널리 읽히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한 뒤 바티칸(Vatican) 언덕의 공동묘지에 이교도와 함께 묻혔다가,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사도 바울의 유해와 함께 오늘날 성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 성당이 위치한 아드 카타쿰바스(ad catacumbas)의 지하묘지에 임시로 안치되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바티칸 언덕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우고, 성상을 모신 제단 밑에 베드로의 유해를 다시 옮겼다고 한다. 때문에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가 초대 로마주교이자 초대 교황이며, 성 베드로 대성당의 대제단 아래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베드로의 로마에서의 활동이나 무덤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의 저작으로 알려진 〈베드로의 첫째 서간〉과 〈베드로의 둘째 서간〉도 바울 신학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베드로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해석이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