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순교

[ martyrium , 殉敎 ]

요약 자기가 믿는 종교, 즉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일.
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지

넓은 뜻으로는 주의 ·사상을 위해서 죽는 경우에도 이 말을 쓰기도 한다. 순교는 주로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교(唯一神敎) 세계에서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톨릭교회에서는 순교를 경신덕(敬神德)으로 여겨 특별히 중요시함으로써 순교에 분명한 뜻을 부여하고 있다. 순교의 수단으로서는 각종 고문 ·투옥 ·유형(流刑) ·참수(斬首) ·화형 ·번롱(樊籠:금고형) ·책형(磔刑:기둥에 매달아 죽임), 돌로 쳐죽이기, 맹수를 이용한 처형 등 여러 가지이다. 돌로 쳐죽임을 당한 성(聖) 스테파노(스테반)가 첫 순교자로 일컬어지는데(사도 7:54∼60), 초대교회 때부터 순교자는 전례(典禮)나 성유물(聖遺物)을 통해서 숭경(崇敬)을 받아 왔다. 로마제국의 박해시대에는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를 비롯하여 순교자가 많이 나왔는데, 두 번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성 세바스찬, 성녀(聖女) 아그네스, 가에키리아 등의 이름과 함께 이른바 카타콤베 성인들을 들 수가 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네덜란드, 혁명기의 프랑스 등에서 많은 순교자를 냈으며, 더 가까이 19∼20세기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 및 멕시코에서 순교의 피가 흘렀다. 순교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을 순교록(Martyro logium)이라고 하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E.S.히에로니무스의 《순교록》이 유명하다. 이것은 5∼7세기의 것이며, 그 뒤의 것으로는 《로마 순교록》(1584)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역사상 첫순교자로 기록된 사람은 신라의 승려 이차돈(異次頓)이다. 527년(법흥왕 14) 불교의 봉행(奉行)을 주장하다 처형된 그의 순교는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삼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가톨릭교도로서는 1785년(정조 9) 정약전(丁若銓) 3형제 등과 함께 예배보다 발각된 김범우(金範禹)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 죽음으로써 사실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珍山:충남 금산)의 권상연(權尙然) ·윤지충(尹持忠)이 가톨릭을 신봉하여 전통적 조상제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참형당해 최초로 순교를 당하였다. 그 후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1년 사이에 이승훈(李承薰) 등 약 300명의 교도가 순교하였는데, 이때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땅에서 순교하였다.

1831년(순조 31) 천주교조선교구가 설치되면서 가톨릭의 교세가 확장되자 정부의 탄압과 박해가 다시 일어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 때는 70여 명의 교도가 순교하였고, 이때 프랑스의 앵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도 함께 참수당하여 한국 땅에서의 유럽인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846년(헌종 12)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이어 대원군이 집정하자 1866년(고종 3)부터 다시 가톨릭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어 이로부터 3년 사이에 8,00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는 세계 종교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서, 어떤 학자는 이를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과 에스파냐의 종교재판에 비교하여 논술하였다. 그리스도교도의 수난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어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朱基澈)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에 항거하다가 순교하였고, 6 ·25전쟁 중에도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참살되어 순교하였다. 1895년(고종 32) 천주교조선교구의 8대 주교이던 뮈텔(한국명 閔德孝) 신부는 대원군(大院君)의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숱한 순교자들의 목격담을 모아 《치명일기(致命日記)》(한글판)를 펴냈는데,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순교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