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

[ Rosa Luxemburg ]

요약 독일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로서 폴란드사회민주당과 스파르타쿠스단, 독일공산당의 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을 위해서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는데, 1919년 1월에 발생한 2차 독일 혁명 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자본축적론》,《러시아 혁명》등이 있다.
출생-사망 1871.3.5 ~ 1919.1.15
국적 독일
활동분야 혁명운동
출생지 폴란드 자모슈치
주요저서 《자본축적론》,《사회민주주의의 위기》,《러시아 혁명》

1871년 폴란드의 자모슈치(당시 러시아 제국령)에서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1873년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한다. 어렸을 때 앓은 병으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프롤레타리아 당원이 된 후 총파업 선동 등의 활동으로 수배되었다. 이때문에 1889년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으며, 취리히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여 1898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1893년에는 함께 공부하던 레오 요기헤스 등과 함께 《스프라바 로보트니차(노동 대의)》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R. 크루신스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해 8월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3차 제2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유명해졌다.

이듬해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당시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을 장악하고 있던 폴란드 사회당의 대표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진정한 사회주의화 국제주의를 주창했으며, 당시 폴란드를 셋으로 분할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민중들과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폴란드의 독립보다 계급적인 연대와 투쟁을 중요시했던 그들의 주장은 당시 많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898년에는 취리히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뤼베크 부부의 아들 구스타프 뤼베크와 위장결혼하여 독일 국적을 얻고, 이후 베를린에 머물면서 독일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한다. 그녀는 20대의 나이에, 당시 독일사민당의 거물이었던 에두아르트 베른스타인의 수정주의, 즉, 고도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혁명과 같은 물리적인 방법보다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의회 진출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권력을 획득해야한다는 베른스타인의 이론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900)라는 논문에서, 베른스타인이 말하는 점진적인 사회주의 권력 장악은 공상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고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녀는 또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의 주도와 정당조직의 규율화를 강조한 레닌의 주장에도 비판을 가하며, 엘리트 혁명이 아닌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바르샤바로 가서 혁명에 동참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고, 풀려난 후에는 베를린에 있는 사회민주당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1907-1914)하면서 《자본축적론》(1913)을 집필한다. 그녀는 이 논문에서 제국주의란 자본주의가 세계의 다른 저개발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사회민주당이 독일정부의 참전을 지지하자, 이에 반대하며 독일사민당을 떠나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프란츠 메링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로마시대에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단으로 개명한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16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투옥된다. 그녀가 감옥에서 집필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1916)는 스파르타쿠스단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그녀는 레닌과 뜻을 같이하여, 기존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대규모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진 새 인터내셔널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을 감옥에서 맞은 그녀는 혁명을 환영하면서,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독재적 권력화를 우려했다. 1918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한편으로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적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 민족자결주의적인 태도 등을 비판하였으며, 혁명이 관료주의화 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1918년 11월 독일에서 발생한 혁명을 계기로 감옥에서 나온 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기관지인 《붉은 깃발(Die Rote Fahne)》을 창간하고, 전쟁을 지지하는 변절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그해 12월 말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이듬해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창설한다. 며칠 후 2차 독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혁명세력과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군부와 결탁한 독일사민당의 우파세력에 의해 살해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이 시기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 도중 호송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1919년 1월 15일). 열흘 후에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장례식이 있었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살해된 후 베를린의 운하에 버려졌고, 4개월이 지난 그해 5월이 되어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들이 동료들과 함께 묻힌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매년 1월 많은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모여서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