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대조전

[ Daejojeon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 昌德宮 大造殿 ]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전각.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대조전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85년 1월 8일
소장 창덕궁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시대 조선 고종 4년(1867)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크기 정면 9칸, 측면 4칸

창덕궁 희정당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자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명칭인 대조(大: 큰 대, 造: 지을 조)는 '큰 공덕을 이룬다'라는 뜻이며,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어필(御筆)이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문조)가 대조전에서 태어났고,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 등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대조전에는 흥복헌, 융경헌, 경훈각 등의 부속 건물이 있는데,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었다.

역사 

1405년(태종 5) 청덕궁이 창건될 당시 지어진 건축물로 추정되며, 창건 당시에는 정침청(正寢廳)으로 불리다가 1461년(세조 7)에 양의전(兩儀殿)이라 명명되었고, 이후 1467년(세조 13)경에 대조전(大造殿)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에 다시 재건하였다. 1833년(순조 33)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1834년(순조 34)에 재건하였고, 일제강점기인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대조전은 다시 소실되었다. 소실된 대조전은 1920년에 복원되었는데 경복궁 교태전을 해체하여 대조전 복원에 사용하였다. 

구조 및 형태

정면 9칸, 측면 4칸의 크기의 건물로 전각 앞에는 월대(月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180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 따르면 대조전의 원래 지붕 형태는 솟을지붕으로 설계되어 가운데가 우뚝 튀어나온 모양이었으나, 1920년 복원 이후 평지붕으로 바뀌었다. 건물 내부를 구성했던 대청과 온돌방은 거실과 침실 등으로 바뀌었고, 건물 내부에 비치된 가구들도 서양식으로 교체되었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었다.

대조전의 내부 벽면에는 화가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그린 '백학도'와 오일영(吳一英, 1890 ~ 1960)과 이용우(李用雨, 1904 ~1952)가 그린 '봉황도' 두 점이 걸려 있었는데, 두 점 모두 2006년에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전시되고 있다.

대조전의 뒤편에는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으로 석축을 쌓아 만든 계단식 화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복궁 교태전의 후원인 경복궁 아미산과 비슷한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각 단에는 흙을 채우고 나무와 화초 등을 심어 장식했다.

가치 및 의의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생활했던 곳이자,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한일병합조약이 채결된 장소로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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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창덕궁 대조전 조선왕궁의 내전을 겸한 침전 보물 제816호 조선 태종 이방원이 재위 5년(1405)에 별궁으로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축되었으며 임진왜란 외 몇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景福宮)의 내전인 교태전(交泰殿)을 옮겨 세운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익공(翼工)집이며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얹어놓았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