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

남사당

[ 男寺黨 ]

요약 조선시대 춤·노래 등 흥행적인 놀이를 가지고 떠돌아다닌 유랑예인 집단.
구분 유랑예인 집단
주요활동/업무 연기
규모 구성원 40~50명

남사당패라고도 하며, 일종의 유랑예인 집단이다. 유랑예인 집단은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남사당이다. 남사당의 연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빈약하여 《고려사》《해동역사》《문헌통고》 등에 기록된 단편적인 것 밖에 없다. 위의 기록도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남사당을, 풍속을 해치는 패륜집단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적인 민중놀이 집단으로 출발하여 지배층이 주관한 놀이와는 성격이 매우 달랐으며, 유지도 그 만큼 어려웠다.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한편, 매춘을 부업으로 삼는 집단에서 출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출현함으로써 이를 남사당이라 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으로 광대·장인·상인보다도 못한 집단이었지만 특별히 볼거리가 없는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기들만의 남색사회(男色社會)를 이루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절과 관련을 맺고 절을 집결지로 삼기도 하였다. 알려진 남사당패의 은거지는 경기도 안성·진위, 경상남도 진양·남해, 전라남도 구례·강진, 황해도 은율·송화 등 지이다.

조직은 모갑이 또는 꼭두쇠라고 부르는 대장 밑에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기획:1~2명)가 있고,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인 뜬쇠(조장:약 14명), 수련생인 가열, 초입자인 삐리, 고문격인 저승패, 잔심부름을 맡는 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지며, 대내외적으로 책임지는 우두머리인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단원들이 모여들거나 흩어진다. 곰뱅이쇠는 남사당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인데,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승낙을 얻는 일을 맡았다. 뜬쇠는 자신들이 하는 연기의 규모에 따라 몇 명씩의 가열을 둔다. 삐리는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연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가열이 되며, 여장(女裝)하는 것이 상례이다.

남사당패거리 사이에서 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외모가 뛰어난 삐리가 많은 패거리일수록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단원들은 보통 가난한 집의 어린이를 받아들이거나 가출아로 충원하였으며, 때로는 유괴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가난한 농가 출신이나 고아 등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나 규율은 엄격하여 일사불란하였으며, 흥행을 통하여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도 하였다. 놀이가 없는 겨울에는 삐리들에게 연기를 지도하였다.

연기 종목은 획일적인 것으로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 6가지가 있다. 풍물은 첫째 순서로, 꽹과리·징·장구·날라리(태평소)를 불고 치며 노는 농악이다. 버나는 대접이나 접시를 돌리는 묘기이며, 묘기로 끝나지 않고 버나잡이와 어릿광대가 주고받는 대사와 소리가 재미를 더한다. 살판은 땅재주 묘기로,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불렀다.

어름은 줄타기로, 버나와 마찬가지로 어릿광대의 대사와 소리가 그만이다. 덧뵈기는 탈놀음이며, 4마당(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으로 구성된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좋은 풍자극이다. 덜미는 맨 마지막 순서로 꼭두각시놀음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인형극이며,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지방에 따라서 '박첨지(朴僉知) 놀음' 또는 '홍동지(洪同知) 놀음'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