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파월

국군파월

[ 國軍派越 ]

요약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국군을 파병한 일(1964년~1973년).

배경

1954년 제네바극동평화회의(제네바 회담)로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통일을 위하여 1955년 남·북베트남 대표의 협의를 거쳐 1956년 통일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사이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 남베트남의 정권을 장악하고 통일선거의 실시를 거부하였다. 한편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통일선거의 시행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통일선거를 거부한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행동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까지 연달아 공산화될 것이라는 ‘도미노이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이 실정을 거듭하자 1960년 남베트남에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NFL)이 결성되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과 교전하기 시작하였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남베트남의 개혁을 요구하며 1962년까지 약 11,000명의 비전투 요원을 파견하였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개혁 요구를 거부하며 정권 강화에 몰두하였고, 결국 1963년 미국의 묵인으로 벌어진 쿠데타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고, 1964년 8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폭격을 개시하였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제1차 국군 파월

통킹만 사건에 앞선 앞선 1964년 4월 미국은 ‘더 많은 깃발(More Flags)’ 정책을 수립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베트남전쟁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은 윈스럽 브라운(Winthrop Gilman Brown)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한국이 베트남에 이동외과병원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국은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였고, 1964년 7월 베트남 파병을 위한 ‘월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견에 관한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에 1964년 9월 한국은 이동외과병원 130명, 태권도 교관단 10명 총 140명을 베트남전쟁에 파병하였다.

사실 한국의 해외 파병은 6·25전쟁의 휴전 직후에도 시도되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공산주의 세력과 갈등을 겪던 라오스, 베트남 등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밝힌 것이다. 또한 1961년에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의장 박정희(朴正熙)가 미국의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위와 같은 파병 제안은 미국이 라오스, 베트남 등지에 파병한 상태가 아니었고, 한국이 파병할 경우 북한중국, 소련 등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거절되었다. 이처럼 한국이 미국에 먼저 그리고 여러 차례 해외 파병을 제안한 이유는 겉으로는 공산주의 세력의 침투 차단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고려하던 주한미군과 대외원조 감축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해된다. 당시 미국은 경상적자 누적이 지속되어 대외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이전과 같이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베트남 정세의 악화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가속화되자 주한미군의 일부를 베트남으로 이동하여 예비전력으로 활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이러한 논의가 잠시 중단되었지만, 1964년부터 이루어진 국군 파월과 주한미군 및 대외원조 감축은 상호 연동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국군 파월

1964년 12월 미국은 브라운 대사를 통해 한국의 추가 파병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이때 미국은 한국이 건설공병단 1개 대대와 의무지원단(야전병원)으로 구성된 비전투 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은 베트남 추가 파병을 위하여 미국과 관련 논의를 진행하는 한편, 베트남 현지에 실무단을 파견하였다. 1965년 1월 ‘월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추가파견에 관한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곧 한국군사원조단 비둘기부대가 창설되었다. 비둘기부대는 육군 및 해병대로 구성된 공병대대와 자체 방위 및 수송을 위한 병력 약 2,00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965년 2월부터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제3차 국군 파월(제1차 국군 전투 부대 파월)

1965년 5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미국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감사하면서 주한미군을 이전과 같이 유지할 계획이며,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의 안보에 힘쓸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한국 전투 부대 1개 사단의 베트남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철수하여서는 안 되며, 미국의 지속적인 경제 및 안보 지원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사전 통보 없는 주한미군의 철수는 없을 것이며, 한국을 계속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국 대통령의 회담으로 한국의 전투 부대 파월이 타결되었다. 이후 1965년 8월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증파에 관한 동의안’이 한국 국회에 통과되어 해병 1개 여단 육군 1개 사단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다. 1965년 9월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초대 사령관에는 수도사단장이었던 채명신(蔡命新) 소장이 취임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해병대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와 육군 수도사단 맹호부대가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 해병대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는 1967년 7월 3개 대대에서 4개 대대로 개편되면서 병력이 증원되었다.

제4차 국군 파월(제2차 국군 전투 부대 파월)

미국의 전투 부대 파병 요청은 1965년 12월에도 이루어졌다. 1966년 1월 미국은 험프리(Hubert Horatio Humphrey) 부통령을 한국에 보내 관련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1966년 3월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미국의 반대급부를 명시한 브라운각서(Brown Memorandum)가 전달되었다. 브라운 각서에는 14개 조항에 걸친 보장과 약속이 명시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①한국방위태세의 강화 ②국군 전반의 실질적 장비현대화 ③보충병력의 확충 ④미국의 국군 파병 비용 부담 ⑤북괴의 남파간첩을 봉쇄하기 위한 지원과 협조 ⑥대한군사원조 이관의 중지 ⑦차관 제공 ⑧대월남물자 및 용역의 한국조달 ⑨장병의 처우 개선 문제 등이었다. 이에 한국은 전투부대 1개 사단과 1개 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1966년 3월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증파에 관한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육군 제9사단 백마부대 및 수도사단 맹호부대의 보충연대인 제26연대 혜산진부대가 파병 부대로 선발되었고, 1966년 4월 혜산진부대가, 같은 해 8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으로 출발하였다. 아울러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전투근무지원을 위한 제100군수사령부 십자성부대 및 근접항공 및 공중수송을 지원하는 공군지원단 은마부대를 창설하였고, 비둘기부대 예하 해군 수송분대를 해군수송전대 백구부대로 개편하였다.

국군의 베트남 철수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이 당선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을 베트남인들에게 맡긴다는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를 내세우며 1969년 7월부터 미군을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따라 1971년 12월 해병대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1973년 1월 파리 평화 협정(Paris Peace Accords)이 체결되면서 잔류하던 한국군은 1973년 1월부터 베트남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국군 파월의 영향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쟁에 국군을 파병하면서 베트남 특수(特需)를 누렸다. 우선 파월 국군과 노동자 등에게 지급된 외화가 한국에 유입되었다. 또한 브라운각서로 한국은 베트남으로 많은 물자를 수출하였고, 1967년~1970년의 수출은 매년 40% 이상의 수치를 기록하였다. 특히 1970년에는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베트남으로의 군수 물자 수출이 이어지면서 한국의 중화학 공업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군사 및 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차관을 확보하였고, 이는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으로 국군에는 약 1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정글에 숨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찾아내기 위해 무분별하게 뿌려진 고엽제(枯葉劑)로 인해 약 50,000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발생하였다. 고엽제는 피해자에게 여러 질환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그 2세에게도 질병을 일으켰으나, 그에 대한 보상은 미비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를 가리키는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 문제도 발생하였다. 이들은 베트남에서 많은 차별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국군 중 일부가 베트남의 양민을 학살하기도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처럼 국군 파월은 한국의 군사 및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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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파월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던 1964년 자유베트남 수호를 위해 비둘기부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이 파견됐으며, 이들부대는 1973년 휴전협정 조인 때까지 많은 공을 세웠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