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따이한

라이따이한

[ Lai Dai Han ]

요약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기술자 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말한다.
원어명 Lai Đại Hàn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혹은 월남전(越南戰)으로도 부르는 베트남 전쟁은 1960년에 개전하여 1975년 4월까지 지속되었다. 본래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과 같은 형태를 보였으나,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북베트남에 선전 포고하면서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 요원을 베트남에 파견했고, 1965년 10월부터는 전투부대인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를 비롯한 각종 지원 부대를 파병했다.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1973년 3월까지 여러 작전을 수행했다.

약 10년에 걸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명암(明暗)이 공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라이따이한은 그 중의 하나이다. 라이따이한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기술자 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즉, 한국계 혼혈 2세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군의 주둔지였던 곳에서 한국 군인 혹은 기술자 등이 현지에 거주하던 베트남 여성과 가정을 만들어 라이따이한이 탄생했지만,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강간이나 매춘에 따른 결과라고도 한다.

1975년 4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통일을 이루자,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철수시키게 되었다. 한국인의 자녀라는 것이 인정된 라이따이한은 한국 정부의 철수 작전에 포함되어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자녀라는 것이 인정된 라이따이한 중에서도 베트남을 떠나지 못한 경우가 발생했는데, 몇몇 한국인들이 라이따이한이 탑승해야 할 자리를 한국과 무관한 다른 사람에게 매매했기 때문이다. 이외에 한국인의 자녀라는 점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강간 및 매춘으로 태어난 라이따이한은 철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베트남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라이따이한의 규모에 대해서는 약 5,000명~약 30,000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인의 철수 이후, 일부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남겨진 자녀를 데려오려는 노력을 시도했지만, 대부분은 왕래가 끊어졌다.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베트남에 남은 라이따이한과 그 어머니는 베트남 사회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살았다.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들은 적대 국가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고 취급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라이따이한 가정은 가난한 삶을 이어갔고, 이는 교육의 부재로 이어져 빈곤의 악순환을 초래했다. 더욱이 한국으로 간 친부와의 연락 두절 혹은 거부는 라이따이한 가정의 고립을 더욱 가중시켰다.

한편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가 재개되자 라이따이한 문제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론을 통한 보도 이후 시민단체와 기독교 단체 등을 중심으로 라이따이한들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베트남에 학교를 세워 라이따이한의 교육을 수행하거나 한국에 있는 아버지를 찾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그럼에도 라이따이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 진행형의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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