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 The Kyunghyang Shinmun , 京鄕新聞 ]

요약 가톨릭 재단에서 창간되었다가 독립지가 된 일간신문.
경향신문 반면

경향신문 반면

발행년도 1946년 10월 06일
발행주기 중앙 종합 일간지
발행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3
사시 진실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할말은 하고 쓸 것은 쓰는 사회공기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부정부패 폭력을 배격하고 자유 정의 인권을 수호하는 데 앞장선다.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민주복지국가를 완성하는 데 전력한다.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고 조국의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기타 발행물 《주간경향》《레이디경향》《경향 게임스》

1946년 10월 6일 천주교 서울교구가 운영주가 되어 창간되었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74번지에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초대 사장은 양기섭(梁基涉) 신부이다.

처음부터 보수적 성격을 논조를 지녔으며, 자유당의 독재체제가 굳어지자 야당성과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하였고, 특히 가톨릭 교도인 장면(張勉) 부통령의 피격사건 후로는 논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야당성 논조로 독자가 크게 늘어, 당시 발행부수 20만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54년 11월부터는 한국 최초로 경향신문 축쇄판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1961년까지 꾸준히 내놓았다. 자유당 정권은 1959년 4월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 《경향신문》을 폐간시킴으로써 국내외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이에 불복한 경향신문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으나, 정부는 폐간처분을 취소하고 무기 발행정지처분으로 바꾸어 발행을 금지하였다. 그 뒤 4·19혁명 이후 1960년 4월 27일자(4327호)부터 속간하였다.

1962년 2월 경영권이 가톨릭 재단에서 이준구(李俊九)에게로 넘어가 가톨릭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독립지가 되었다. 1964년 6·3 비상계엄령 아래에서 사장 이준구 등이 구속된 바 있었고, 1965년 8월 이사장 등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1966년 4월 기아산업계(起亞産業系)가 신문을 인수하였고, 1969년 4월 신진자동차계(新進自動車系)로 넘어가는 등 경영자가 자주 바뀌고 경영난을 겪다가, 1974년 7월 24일 한국 문화방송주식회사(MBC)와 통합하기에 이르러 같은 해 11월 1일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으로 개편하여 매스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재출발하였다.

따라서 새로 설립된 문화방송·경향신문의 경영권은 5·16장학회가 소유하였다. 소공동 사옥을 처분하고 정동(貞洞) 문화방송 빌딩에 연결된 새 건물로 옮겼다. 통합 후 경영 여건의 개선으로 18억 8,000만 원에 달하던 통합 당시의 부채가 1년 만에 청산되고 운영정상화에 성공하였다. 1980년 언론기본법에 따라 하나의 회사로 되어 있던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을 분리하여 신문과 방송 2개의 독립된 회사로 되었다. 사단법인으로 출발했던 경향신문은 1990년 8월 1일 한화그룹이 인수,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그후 1998년 한화그룹에서 독립, 사원주주회사로 출범하였다. 사원들의 전체 회사 주식의 보유율은 96%이다.

그 후 1968년 11월에 《주간경향(週刊京鄕)》, 1969년 9월에는 《소년경향》을 각각 창간하였다. 1990년 10월 격주간지 《레이디 경향》을 월간으로 전환하고, 1992년 《뉴스 메이커(현 주간경향)》를 창간하였다. 1995년 타블로이드판 '주말 매거진'과 신세대 섹션페이지 '매거진X'를 발행한데 이어 1996년 여행정보섹션 '트레블'을 주 1회 발행하고 있다. 1997년 4월 7일 전면가로쓰기를 단행하였다. 2000년 2월 언론사 최초로 최고경영자 사외공모를 실시하여, 신임 사장을 선출하였다.

사업으로는 뉴미디어사업(경향닷컴, e하우징, 전광판), 경향하우징페어(서울, 부산, 전주), 경향 이화콩쿠르, 경향사도상, 대통령배전국고교축구대회, 체신봉사상, 경향전기에너지대상, 정동문화축제, 대통령기통일역전마라톤대회, 경향서울오픈마라톤대회 등을 벌이고 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3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