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장면

[ 張勉 ]

요약 정치가.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 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한 후 미국에 가서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4·19혁명 후 국무총리로 당선되어 집권하였다.
장면부통령 묘

장면부통령 묘

출생-사망 1899.8.28 ~ 1966.6.4
본관 인동(仁同)
운석(雲石)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인천

1899년 8월 28일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운석(雲石)이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YMCA영어학교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에서 활약하다가 서울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에 취임, 8·15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敎皇廳)을 방문한 후 미국에 가서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駐美大使)가 되어 한미국교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1950년 영국 포덤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6·25전쟁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였다.

그 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해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하였으나 경상(輕傷)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1960년 조병옥(趙炳玉)과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후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심하다가 간염으로 죽기 직전 정치정화법에서 풀렸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포천(抱川)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