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정변

5·16군사정변

[ 五一六軍事政變 ]

요약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5기 및 8기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
헌법개정안에 서명하는 박정희 의장

헌법개정안에 서명하는 박정희 의장

배경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채택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당은 국무총리 장면(張勉) 중심의 신파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중심의 구파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정국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였다. 또한 4·19혁명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고 있었다. 4·19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은 한국사회계몽, 남북통일논의, 반미 자주화 등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사회와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6·25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를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朴正熙)와 중령 김종필(金鍾泌)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전개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국무총리 집무실, 중앙청, 육군본부 등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였다. 한강 인도교 진입 과정에서 벌어진 육군본부 소속의 헌병대 약 50여 명과의 교전 외에는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軍事革命委員會)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방송국을 통해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하고 강화할 것, ②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하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이와 같은 우리들의 과업이 성취되면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는 주한미국대사 마셜 그린(Marshall Green)과 함께 자신들의 허가 없는 군사 이동은 불법이며 장면 내각을 지지함을 표명하였다. 국무총리 장면과 여러 국무위원은 군사정변 직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기에 매그루더 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군사정변의 진압을 주장하였다. 한국의 대통령 혹은 총리의 재가를 얻고 한국군을 동원하여 군사정변을 진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변의 진압에 대해 윤보선 대통령은 전방의 군대를 동원하는 사이 북한의 침입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사이 군사정변을 반대하던 제1야전군사령관 이한림(李翰林)이 군사정변세력에게 체포되었고, 서울대학교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규합하여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을 주도하였다. 한편 쿠바 문제를 겪고 있던 미국은 군사정변이 발생한 한국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고, 매그루더 사령관과 군사정변세력의 만남 후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되었다. 곧 미국은 군사정변을 인정하였고, 1961년 7월 공식적으로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군사정변이 성공한 것이다.

결과와 영향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조직폭력배, 병역기피자 등도 처벌 대상이었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면서 제3공화국을 정식 출범시켰다.

5·16군사정변은 권력을 지향한 일부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다.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참조항목

12·12사태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관련동영상

5 ·16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으로 군의 탈법적 정치개혁에 선례를 남겼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