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2세

비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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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6. 3. 2, 로마
사망 1958. 10. 9, 이탈리아 간돌포 성(城)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939~58 재위).
본명은 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elli.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교황직
  4. 전쟁기간
  5. 후기의 교황의 관심사
비오 12세(Pius XII)
비오 12세(Pius XII)

개요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 후 재건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이끌었다.

수많은 강론과 몇몇 회칙을 통해 당시의 도덕적·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전례와 성서 연구에서 국제적 체계와 개혁에 대한 그의 생각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중에 보인 그의 행위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초기생애와 경력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토스카나 출신이고, 1819년 이래 바티칸의 법률가들을 배출했다. 그는 로마의 시립학교에서 교육받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곧 집에 머물렀다. 1899년 사제임명을 받은 그는 머리회전이 빠르고 남다른 기억력을 가진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신학 정보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 법학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따라서 교황청서기관으로 진출했다. 그뒤 급속히 승진하여 1917년 대주교가 되어 교황대사로서 정교조약(교황청과 국가 간의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바이에른의 궁정으로 갔다.

이것이 체결되자 1925년 그는 같은 목적으로 베를린으로 갔고 비오 11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1929년말 로마로 소환되어 국무장관이 된 이래 10년 동안 근무한 후, 교황사절로 남·북 아메리카 및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교황에 선출되었는데, 1623년 이래 가장 짧았던 교황선거 비밀회의를 통해서였다.

교황직

이런 경험들은 비오의 교황직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것들이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대대로 교황청에 헌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교황령 상실로 비탄에 잠겨 있었고, 성직에 있으면서 세속세계에 대해서는 분개하며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정교협약의 원리에 중심을 맞춘 외교적 전통과 기술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정교협약이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대립하는 정권하에서도 교회의 특권 및 행위의 자유를 유지하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파첼리가 독일에 가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권력을 잡았다(1922). 법률가인 파첼리의 동생이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와의 정교협약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가톨릭 대중당과 무솔리니를 축출하기 위한 기회는 희생되었다. 로마 문제를 이렇게 해결함으로써 바티칸을 도시국가로 만들었고(1929), 비오 11세와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야심을 만족시켜 주었다(바티칸시티). 그러나 또한 파첼리의 앞으로의 생애 30년 동안 적의를 지닌 독재권력과 전쟁 후 독재권력을 뒤이은 불안한 민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파첼리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독일에서 12년을 지내는 동안 파첼리는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독일 사람들에 대해 큰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독일 사람들의 끈기있고 정연한 노동자로서의 미덕을 존중했고 바티칸에 도움을 주는 많은 독일인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독일 사정에 대해 깊이 알게 됨으로써 나치즘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게 되었고, 주로 비오의 작업이었던 히틀러 정부와의 정교협약(1933)은 적의를 지닌 독일 사회에서 가톨릭교도들의 생활과 사목의 기반을 확보하는 데 목적을 둔, 고의적으로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고 그는 종종 말했다.

반(反)나치 회칙인 〈극도의 슬픔으로 Mit brennender Sorge〉(1937)의 작성에 참여했고, 국가의 서기로서 독일정부에게 보낸 다른 수십 통의 문서와 각서, 나치의 외무부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로마에서 냉혹하게 맞이한 일, 193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에 직면해 오스트리아의 추기경 테오도르 이니처의 나약함을 호되게 비난한 일, 결국 파첼리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독일이 달갑지 않게 여긴 일 등 이 모든 것은 그가 독일의 전제정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황으로 선출된 것과 전쟁 발발 사이의 몇 달 동안 비오 12세는 재난을 막는 데 외교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유화정책에서라기보다 바티칸은 뮌헨 협정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뮌헨 협정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독일 권력을 확장하는 데 희생되었다. 특히 비오는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게 하려고 노력했고, 실패하자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전쟁기간

전쟁에 대한 비오의 요구는 그의 엄격하고도 일에 대한 광범위한 능력과 조화를 이루었다.

추축국으로부터 항상 협조를 받아낸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인간답게 하고, 고통·불안·슬픔을 없애려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은 대체로 인정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일련의 크리스마스 방송(1939~48)을 통해 전후 세계와 새로운 질서를 제공할 기회를 내다보았는데, 그 속에서 국제적 공동체는 전쟁을 낳은 국수주의를 대신해 진실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오가 전쟁과 관련해 취한 행동과 발언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민족성을 초월해 아버지 같은 책임감을 깊이 의식했고, 중립을 지키기로 서약했고, 비그리스도교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무방비의 상태에서 앙갚음의 두려움을 갖고 있던 교황은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많은 고통을 당했고, 이런 고통은 싸움을 혐오하는 기질 때문에 증대되었다. 그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억압받는 그리스도교도나 유대인을 변호하는 권위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을 소홀히 한 데 대해 비난을 받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나치에 항의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채 그들의 정책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어려운 기간 동안 비오의 선택에 대해 인정을 하는 사람들이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경박하고 피상적이었다. 그에게는 자연스런 것이었고 분명했던 질문, 즉 전통적인 외교술의 뉘앙스, 암시, 완곡한 언급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필사의 투쟁과 계획적인 대량학살이라는 잔인함에 적합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완전한 침묵은 아니라지만 중립성의 문제는 중립에 대한 도덕적 명분이 없었으므로 완전히 극복되지는 않았다.

후기의 교황의 관심사

비오는 국제공산주의를 몰아내고자 하는 어떠한 운동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했지만 가톨릭교도들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1946)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전쟁 후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 민주당과 극좌파 사이의 불안한 균형을 감지한 비오는 가톨릭교도 운동의 지도자인 루이지 제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제다가 정책에 간섭하자 의회의 기독교 민주당은 당혹해했다.

이것에 대해 총리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항의해 성공을 거두자(1949) 바티칸에 있던 비오는 실망했다. 비오의 건강이 나빠져 교황청의 독재자인 알프레도 오타비아니를 포함한 추기경들의 권력이 '관료체제'로 넘어가자 이탈리아 대중들의 생활에 대한 성직자들의 간섭은 최고조에 달했다. 특별 청중들에게 했던 비오의 수많은 강론들 가운데 대부분은 급박한 도덕적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현대의 전쟁에 대해서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냈고 전쟁을 방지하는 정책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그는 에큐메니즘에 있어서는 1949년 아주 작은 양보를 했을지라도 가톨릭적인 사고나 정책은 개선하지 않았다(산아제한).

비오의 가장 위대한 회칙은 〈성령의 영감 Divino Afflante Spiritu〉(1943)였는데, 이것은 가톨릭 성서연구에 신선한 충격과 방향성을 제시했다.

성서연구는 비오 10세 당시 모더니즘으로 인해 조성된 위기의 시대 이래 지속된 엄격한 분위기 때문에 방해를 받아왔다. 모더니즘은 현대의 철학적 비평 방법을 성서 및 그리스도의 삶에 적용시키려고 한 운동으로 자의적인 철학적 가정으로 인해 쇠퇴되었다. 이 회칙은 현대 성서학자들의 방법론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하느님의 중개자 Mediator Dei〉(1947)은 전례운동에 대한 일종의 헌장으로, 공동체의 특성을 공식적인 예배로 복원시키고자 했으나 과도한 실험은 불신했다.

좀더 보수적이고 의심을 나타내는 견해는 〈인류 Humani Generis〉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신학적 경향을 다룬 것이다.

말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고독한 성격은 더욱 심해졌고 보수적인 교황청의 힘을 증대시켜 몇몇 나라에서는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프랑스 같은 곳에서 사제들이 자신들의 사목을 확대시키기 위해 노동과 사목을 공유했는데, 이런 노동사제들을 전통적인 종교적인 업무에 복귀시킴으로써 깊은 반감을 야기시켰다.

비오가 1958년 간돌포 성에서 죽었을 때, 세계는 정중한 애도를 표시했지만 로마는 별다른 표시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능있고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역사는 그를 위대하고 창조적인 교황 반열에 오르게 하지 못한 듯하다.

비오 12세(Pius XII)
비오 12세(Pius X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