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벤트로프

리벤트로프

다른 표기 언어 Joachim von Ribbent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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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3. 4. 30, 독일 베젤
사망 1946. 10. 16, 뉘른베르크
국적 독일

요약 나치정권의 외무장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이 된 여러 조약들을 이끌어냈다.
리벤트로프는 1932년 히틀러 를 만났으며 그해에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 1933년 1월 30일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총통의 수석외교고문이 되었다. 이듬해 제네바 군축회의의 독일대표로 임명되었고 1935년 6월에는 영·독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의 재무장을 승인받았다. 1938년 2월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이탈리아와 '철의 동맹'(1939. 5. 22)을 체결, 유럽의 두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전시동맹체제로 연결시켰다. 리벤트로프 활약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 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독일은 안심하고 폴란드를 침공할 수 있었고 바야흐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40년 9월 27일 반미(反美) 상호원조조약인 독·이·일 3국동맹을 성립시켰다. 1945년 6월14일 함부르크에서 체포된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 회부되어 4가지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나치정권의 외무장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이 된 여러 조약들을 이끌어냈다.

리벤트로프는 1932년 히틀러를 만났으며 그해에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 1933년 1월 30일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총통의 수석외교고문이 되었다. 이듬해 제네바 군축회의의 독일대표로 임명되었고 1935년 6월에는 영·독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의 재무장을 승인받았다. 주영대사(1936~39)를 지내면서 철저한 영국인 혐오자가 된 그는 폴란드에 대한 영국의 원조가 순조롭지는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고 이러한 조언은 단시일 내에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 사이 리벤트로프는 일본과 교섭하여 반코민테른협정을 하기도 했으며(1936), 1938년 2월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이탈리아와 '철의 동맹'(1939. 5. 22)을 체결, 유럽의 두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전시동맹체제로 연결시켰다. 리벤트로프 활약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독일은 안심하고 폴란드를 침공할 수 있었고 바야흐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개전과 함께 리벤트로프의 위상은 급격히 하락했다.

1940년 9월 27일 반미 상호원조조약인 독·이·일 3국동맹을 성립시켰으나 그후 외교는 부차적인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그는 단지 히틀러의 후광으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히틀러 암살공모사건(1944. 7. 20)에 몇몇 외무부 직원들이 연루됨으로써 그것마저도 잃게 되었다(→ 독·소불가침조약).

1945년 6월14일 함부르크에서 체포된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 회부되어 4가지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감옥에 있는 동안 회고록 〈런던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Zwischen London und Moskau〉(1953)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