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사상

중도사상

다른 표기 언어 madhyama-pratipad , 中道思想

요약 불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적 수행은 중도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중도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즐거움과 괴로움, 있음과 없음, 생함과 멸함, 단견과 상견 등 상대적인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면 일체의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어 최초로 설법한 것을 초전법륜이라고 하는데, 이 초전법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중도사상이다. 이러한 중도는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바탕이 되는 실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원시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는 중도에 입각한 수행방법이며, 12연기로 대표되는 연기설도 중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불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적 수행(修行)은 중도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중도를 중로(中路) 또는 간략하게 중(中)이라고도 하고, 중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을 중관(中觀)·중도관(中道觀)·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이라고 한다. 또한 세계의 진실한 모습이므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도 한다.

중도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즐거움(樂)과 괴로움(苦), 있음(有)과 없음(無), 생함(生)과 멸함(滅),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등 상대적인 어떤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면 일체법(一切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非無),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亦有亦無).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어 최초로 설법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이 초전법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중도사상이다.

이러한 중도는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바탕이 되는 실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석가모니 시대에 가장 근접한 초기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그때 세존(世尊)께서는 5명의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이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 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下劣)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相應)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이와 같이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했다는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한다. 원시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는 중도에 입각한 수행방법이며, 12연기(十二緣起)로 대표되는 연기설도 중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도 원시불교설의 중도사상을 받아들여 중도는 단·상(斷常)의 이견(二見)을 떠난 입장이라고 했으나, 실재론적 편향으로 말미암아 중도의 의의를 바르게 수용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시조로서 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를 세운 용수(龍樹 Nāgārjuna)는 당시 성행하던 실재론적 견해를 타파하고, 반야경(般若經)의 공관(空觀)에 입각한 중도를 주장하여 근본불교의 중도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했다.

그는 〈중론 中論〉에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라는 팔부중도(八不中道)를 말하여 모든 사견(邪見)을 타파하고, "연기법(緣起法)이 곧 공이며 또한 가명이며 또한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라는 삼제게(三諦偈)로서 중도의 뜻을 간명하게 정의했다.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설은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속제(世俗諦)의 진속이제설(眞俗二諦說)을 기초로 한다. 출세간(出世間)의 차원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자각한 올바른 진리를 제일의제 또는 진제(眞諦)라고 한다. 그러나 일체법(一切法)이 비록 공하지만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연기하여 상대적인 세계가 이루어지므로 세간(世間)의 관점에서는 유(有)를 인정하는 세속제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제일의제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세속제 역시 제일의제에 근거하고 있다. 용수는 이러한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이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면 불법(佛法)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고 설하여 공이 결코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연기에 의한 중도임을 역설했다. 이와 같은 이제설과 삼제설은 후대 불교 교리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관학파의 입장을 계승한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용수의 이제설과 팔부중도설에 기초하여 삼종중도(三種中道)를 주장했다.

삼종중도는 삼론종에서 모든 중도설을 총괄하여 세제와 진제 그리고 이들을 종합한 이제합명을 건립하고 각각 세제중도(世諦中道)·진제중도(眞諦中道)·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3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세제중도는 세속제의 차원에서 일체법이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것(不生不滅)이다. 진제중도는 제일의제의 차원에서 일체법이 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非不生非不滅)이다. 이제합명중도는 세제중도와 진제중도를 회통(會通)한 궁극적인 차원에서 일체법은 생하거나 멸하지도 않으며, 생하지 않거나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非生滅非不生滅)이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용수의 삼제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세계의 참모습을 삼제원융(三諦圓融)으로 설명한다.

삼제는 공제·가제·중제를 말하는 것으로, 공제는 일체의 존재를 공이라고 봄으로써 부정하고 그 부정으로부터 일체만법의 여여(如如)함을 깨닫는 것이다. 즉 현실세계의 본성은 연기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공이며 불이(不二)이다. 이처럼 공제에 의해 부정된 존재세계는 가제에 의해 다시 가유로서 긍정된다.

즉 공으로 파악된 세계를 다시 부정하여 공 역시 공(空)임을 깨닫고 공으로부터 가로 역입(逆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립된 공제와 가제는 서로를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대립적인 진리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공제와 가제를 모두 부정하면서 동시에 양자를 총괄하여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중제이다. 삼제는 이와 같은 논리적 구조를 지님으로써 일즉삼삼즉일(一卽三三卽一)의 관계를 이루어 어느 하나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성립되지 않으며, 삼제가 각각 공·가·중의 의미를 중층적으로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삼제는 원융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다르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삼제원융에 의하여 중생의 일심(一心)이 곧 삼제를 모두 융섭(融攝)하고 있음을 관하는 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고 한다. 화엄종에서 말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세계관도 중도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원융무애한 중도의 원리를 그의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릇 일심의 원천은 유·무를 떠나서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속을 융화하여 담연(湛然)하다. 담연하여 둘을 융화하나 하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하므로 양변(兩邊)을 여의었으나 그렇다고 중간도 아니다. 중간이 아니면서 양변을 떠난 까닭에 있음의 법(法)이 아니면서도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 없음의 모습이 아니면서도 있음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화한 까닭에 진(眞)이 아닌 사(事)가 아직 속(俗)이 된 것은 아니며, 속이 아닌 이(理)가 아직 진이 된 것도 아니다. 둘을 융화하면서도 하나가 아닌 까닭에 진 속의 성품이 서지 않는 바가 없고, 염(染)·정(淨)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 양변을 여의었으나 중(中)이 아닌 까닭에 유·무의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 없고, 옳고 그름의 뜻이 두루하지 않는 바 없다. 그러므로 파함이 없으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으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아무런 이치가 없으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며[無理之至理], 그렇지 않으면서도 크게 그러하다[不然之大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