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건축

일본의 건축

다른 표기 언어 일본건축 , Japanese architecture , 日本建築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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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의 일본건축
  2. 중세의 일본건축
  3. 근세의 일본건축
  4. 근대의 일본건축

일본의 전반적인 문화가 끊임없이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수용하여 이를 일본 고유의 것으로 전개시켜 나갔듯이 건축도 유사한 속성을 갖고 전개되어왔다.

원시시대를 벗어나 본격적인 건축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는 한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중국식 목조건축술을 발전시켜나갔다. 19세기말 다시 서양과의 접촉이 시작되면서 서구식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나갔다. 외래 건축의 수용과 함께 일본의 자연조건이나 종교, 그리고 일본인의 고유한 심미관 등이 영향을 주어 고유한 건축문화가 형성되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수목이 울창한 산으로 덮여 있고, 양질의 목재가 풍부한 자연 조건 속에서 목재가 건축 재료의 주종을 이루었다. 이점에서 화강석이 많이 이용되는 한국이나 벽돌을 적극 활용한 중국의 건축과 크게 대조된다. 비가 자주 오고 여름에는 무더우며 습도가 높은 기후조건 때문에 대체로 지붕은 경사가 급하고 실내는 개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랫동안 불교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어 건축에서도 불교사찰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고유한 종교인 신도에 영향받은 신사건축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불교건축이 중국식 건축 형태를 갖고 있는 데 반해 신사건축은 원시시대 건축에서 유래되는 고유한 형태를 간직하는 점이 주목된다.

오랜 농경생활 속에서 자연과 동화된 가운데 일본의 고유한 건축관이 형성되었는데, 좌우 비대칭의 건물배치, 수평성을 강조한 외관, 굴곡이 없는 평탄한 실내공간, 단순한 형태, 치밀하게 정비된 세부의 처리 등이 특징이다. 건물배치에서는 여러 건물들이 일렬로 늘어서거나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경직된 딱딱한 외부공간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뚜렷이 나타난다.

건물 외관은 지붕 처마의 평탄한 선을 비롯하여 기둥을 연결하는 여러 개의 수평 부재들과 건물 사방에 설치된 툇마루들로 해서 전체적으로 수평적인 안정감을 이룬다. 실내는 네모 반듯한 단순한 내부와 반듯이 처리된 천장으로 밝고 반듯한 실내공간을 꾸미고, 복잡한 채색을 피해 색채를 단순화하고, 창살의 무늬도 수직과 수평선으로 구성하는 등 외관을 단순하게 처리한다. 각 부재의 가공에서는 부재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가공하고 이것들이 서로 치밀하게 맞물리고 서로간에 일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여 정연하게 정돈된 형태미를 추구한다.

고대의 일본건축

고대는 흔히 원시시대를 거쳐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6세기를 지나 중앙집권적 관료사회가 서서히 무너지는 12세기 중반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에는 한국에서 불교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건축물이 만들어졌고 다시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건축술에 큰 발전을 보이다가 점차 일본의 풍토에 맞는 토착적인 건축으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을 밟았다. 불교 도입 이전, 원시시대에는 주로 움집과 일종의 다락집이 지어졌다. 움집은 땅바닥을 파내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설치한 것으로 대개 가족들의 일상적인 주거로 사용되었으며,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만든 다락집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였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부족민의 안녕을 비는 신사건축은 이때부터 발생했는데 주로 다락집의 구조를 갖춘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형태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반경에 한국을 통해 불교가 도입되었는데, 주로 백제 기술자들의 지도하에 사찰이 세워지면서 건축은 종전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획기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 사[法隆寺]의 금당과 5층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의 지도로 지어진 대표적인 현존 건물이다.

돌로 네모반듯한 기단(基壇)을 설치한 것이나 둥근 기둥 위에 공포(拱包)라고 하는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사용한 점, 처마에 곡선이 생기고 지붕에 기와를 덮는 방식 등은 그 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기법들이었다. 특히 이 건물들에는 공포 부분에 구름 모양을 새긴 부재가 나타나고 건물 주변에는 만(卍)자를 무늬화한 난간 장식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고구려나 백제 건축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唐)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으면서 구조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한편 일본 고유의 조형 감각을 살린 건축물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8세기에 지어진 야쿠시 사[藥師寺] 동탑이 대표적인 예이다.

3층 목탑인 이 건물은 각층 탑신부에 다시 가늘고 섬세하게 가공한 벽체(壁體)를 부가하고 작은 크기의 지붕을 따로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음악적인 율동감과 섬세한 외관을 구성하여 일본건축의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귀족층 사이에서 불교 중에서도 밀교나 정토교가 유행하게 됨에 따라 건축의 토착화가 촉진되었다. 밀교 영향으로 사찰은 산악 신앙을 반영하여 주로 산간에 짓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산의 자연지형에 영향받은 불규칙한 건물 배치가 나타나고 예불 방식도 변화하면서 평면도 달라지게 되었다.

불상을 모신 본당 앞에는 예불을 위한 하이덴[拜殿]이 생기고 두 건물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면서 건물 내부는 불상을 모신 나이진[內陣]과 예불을 하는 게진[外陣]으로 구분하게 된 것이다. 정토교의 유행은 서방 극락정토를 현세에 구현하려는 시도를 낳았고 그에 따라 건물들은 극락세계를 구현한 듯한 화려한 치장과 아름다운 누각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하게 되었다. 우지[宇治] 시의 뵤도인[平等院] 아미타당은 당대의 건축관을 잘 나타내는 예이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연못을 앞에 두고 좌우대칭으로 누각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봉황 장식을 올린 건물이 있고 실내에는 금빛 화려한 불상을 모셨다.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헌을 통하여 고대의 귀족 주택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신덴[寢殿]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각각 부속 건물이 세워진 좌우대칭 구성을 하는 것이 특징이고 실내 공간이 기능상으로 명확히 분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의 주택 형식을 신덴즈쿠리[寢殿造]라고 부른다.

중세의 일본건축

중세는 12세기초 정치 실권을 쥔 무사 세력이 가마쿠라[鎌倉]에 실질적인 행정부인 바쿠후[幕府]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어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지방 각지에 영주들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면서 서로간에 대립적인 관계를 지속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건축의 중심은 주로 불교사찰이었다. 불교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고 지방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파나 지역에 따라 각기 특성을 달리하는 건축물이 지어졌다. 무엇보다도 중국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건축형태가 도입된 것은 중세 건축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12세기초에 도다이 사[東大寺]의 대불전을 재건하면서 중국 남쪽 지역의 새로운 구조형식이 도입되었다. 높은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누키[貫]라고 하는 횡부재를 여러 층으로 중첩하여 축부를 고정시키고 천장을 노출시키면서 굵고 흰 보를 걸치는 이 구조는 호방하면서도 구조적인 강력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구조형식을 취한 건물은 그 전에 지어지던 섬세한 외관을 중시하던 건물에 붙여진 명칭인 와요[和樣]와 구별하여 다이부쓰요[大佛樣]라고 불린다.

도다이 사(Todai Temple)
도다이 사(Todai Temple)

이와 별도로 13세기에는 다시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도입되면서 그와 함께 새로운 구조형식이 전래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건물은 젠슈요[禪宗樣]라고 부른다. 젠슈요는 공포 부분에서 이제까지 기둥 위에만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포를 설치하던 것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포를 설치하는 것으로 한국건축의 다포형식과 유사한 것이다. 한국건축의 다포형식 건물과 마찬가지로 젠슈요에 속하는 건물들은 우선 처마 밑에 복잡하게 가공된 많은 부재들이 중첩되고 실내에는 복잡하게 가공된 많은 부재들이 중첩되어 있어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다만 일본의 젠슈요는 지붕을 구성하는 구조 방식이 변화한 결과, 건물 외관이 더욱 섬세하고도 정연하게 가공되는 점이 특징이다.

일본건축의 지붕은 일찍부터 많은 강우량에 대처하면서 경사가 급하게 되었는데 그결과 처음 한국이나 중국에서 도입될 때와 같이 서까래 위에 많은 흙을 덮던 방식을 바꾸었다. 즉 서까래와 지붕널 사이를 공간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는 실제로 힘을 받치는 별도의 서까래를 내부에 설치하여 지붕의 경사는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처마에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장식적인 서까래를 걸치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그에 따라 처마 부분에 보이는 서까래는 실제 힘을 많이 받기 때문에 가늘어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서까래는 가늘면서 각 부재가 서로 일정한 치수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될 수 있게 되었다. 서까래가 가늘어지고 정연한 배열을 한 것과 동시에 나머지 공포 부분을 비롯한 다른 부재들 역시 서로 정연한 치수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섬세하고도 치밀한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러한 부재 가공을 가능하게 한 양질의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자연조건도 작용했다.

3가지 건축형식 가운데 다이부쓰요는 재래식 구조에 익숙해 있던 기술자들의 호응이 낮아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중세의 일본건축은 주로 와요와 젠슈요, 그리고 각 형식이 서로 절충된 절충형식이 주류를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나라 도다이 사의 남대문과 효고 현의 조도 사[淨土寺] 정토당이 다이부쓰요의 대표적 예이며 가나가와 현의 엔카쿠 사[圓覺寺] 사리전은 젠슈요의 전형적인 예로 손꼽힌다.

근세의 일본건축

근세는 전국이 각 지역 영주인 다이묘[大名]간의 세력다툼으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시기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이 통일되고 이후 약 250년간 도쿠가와[德川] 집안이 봉건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시기를 지칭한다. 근세 초기에는 전국에 수많은 성곽이 건립되었고 통일 후에는 각 지방도시에 인구가 늘고 상업이 번성하면서 도시 생활과 관련한 건축물들이 크게 늘어났으며 특히 주택건축이 세련된 조형미를 갖추면서 전개되었다. 성곽은 중세에는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산에 지어졌으나 전국이 통일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인구가 밀집한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았고 주변에 여러 겹의 호를 둘러싸고 굴곡이 많은 통행로와 다양한 형태의 높은 성벽을 겹겹이 쌓았으며 가장 중심부에는 천수(天守)라고 부르는 높은 누각을 세워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즈치[安土] 성의 천수는 화려한 7층의 것이었다고 전하며 현존하는 성곽으로는 효고 현의 히메지[姬路] 성이 유명한데 크고 작은 지붕들이 서로 겹겹이 중첩되면서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잘 남기고 있다. 이들 성곽 입구에는 상인들이나 일반 주민들이 밀집하여 거주하는 조카마치[城下町]라는 거리가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상업시설들을 비롯하여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이나 숙박시설 등 활기 넘치는 도시시설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독특한 도시 경관을 형성했다.

근세의 상류계층 주택은 쇼인즈쿠리[書院造]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쇼인). 이들 상류계층 주택에서는 외래 손님을 접대하는 기능이 특별히 강조되었으며 안쪽 깊숙이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있고 그 중간에 심부름하는 사람들의 방들이 마련되었다. 접객 장소인 쇼인은 그림이나 꽃을 장식한 선반이 따로 장식되고 정원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으며, 전체적으로 비대칭적인 공간구성을 갖추었다(→ 조경). 이 시기에 상류층 주택이나 불교사원에는 차를 마시기 위한 별도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이 다실(茶室)은 최소한도의 크기만을 유지하고 거의 장식을 가미하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양식이었으며, 쇼인즈쿠리의 접객 공간이 절충되면서 자연경관과 조화된 뛰어난 주택건축이 지어졌는데, 교토부[京都府]의 가쓰라이 궁[桂離宮]이 가장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다도). 이 건물은 흑색과 백색의 대비, 장식의 철저한 배제, 자연과의 조화가 하나의 건축물 속에서 완벽하게 실현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근대의 일본건축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문물과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면서 일본건축은 근대기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외국인 건축가나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곧 대학 교육과정에 건축학을 도입하여 일본인 건축가들을 양성하는 한편, 건설 산업 자체를 서구식으로 개편하여 서양의 건축기술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가타야마 도쿠마[片山東熊]는 대표적인 초기 건축가들이다. 이들은 주로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설계 수법을 습득하여 그것을 일본의 기술 수준 속에서 모방하면서 서구식 건축물들을 곳곳에 세워나갔다. 이후 1920년 대에 관동대지진을 거치면서 구조적인 보강에 힘을 기울이게 됨에 따라 서구식 건축술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 주택에서도 서양식이 가미되어 응접실이 새로 나타나고 종래의 좌식 생활과 함께 의자식 생활이 도입되었으며, 가족 공동의 공간보다 점차 개인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의 혼란이 극복되면서 서양의 새로운 건축사조를 수용한 합리적인 건축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움직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건축가로 마에카와 구니오[前川國男], 단게 겐조[丹下健三]를 들 수 있다. 특히 단게는 1964년의 도쿄 올림픽 경기장의 여러 시설을 설계하면서 새로운 구조기술을 바탕으로 한 일본 고유의 형태미를 살려냄으로써 일본건축을 국제적인 수준에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1960년대 이후에 무라노 도고[村野藤吾],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등 장식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감각과 토착적인 조형성을 살린 건축가들의 활동을 통해 일본건축은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