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

다른 표기 언어 Archimedes
요약 테이블
출생 BC 290(~280경), 시칠리아 시라쿠사
사망 212/211, 시라쿠사
국적 그리스

요약 아르키메데스는 구와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표면적과 부피의 관계,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인 아르키메데스의 스크루펌프 등으로 유명하다. 생애 대부분을 시라쿠사에서 보낸 그는 BC 213년 로마인들에 의해 이 도시가 포위공격을 당했을 때 매우 효과적인 전쟁기계를 만들어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도시는 1년여 후에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도시의 약탈이 이루어질 때 그도 살해되었다. 그리스의 전기작가인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당대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실용적인 발명에 대해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구 제작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제외하면 알려진 그의 모든 연구가 이론적이다. 그는 이론역학과 유체정역학에 관한 연구를 집필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구와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표면적과 부피의 관계,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아르키메데스의 스크루펌프 등으로 유명하다.

활동 초기에는 이집트에서 얼마간을 보낸 것 같지만, 대부분은 시라쿠사에서 거주했고, 이곳의 왕인 히에론 2세와 함께 절친하게 지냈다. 아르키메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인 사모스의 코논과 키레네의 에라토스테네스를 비롯한 그 당시 주요 학자들과 서신교환의 형태로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BC 213년 로마인들에 의해 시라쿠사가 포위공격을 당했을 때 이 도시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효과적인 전쟁기계를 만들어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결국 BC 212년 가을 또는 BC 211 봄에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 의해 함락당했으며, 아르키메데스는 이 도시가 약탈당할 때 살해되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고대의 과학자들보다도 훨씬 더 자세하게 남아 있지만, 주로 그의 역학적인 독창성이 통속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졌음을 반영하는 일화들이다. 그는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인 '아르키메데스의 스크루펌프'를 발명했고, 마르켈루스가 로마로 가지고 간 2개의 '구'(球)를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스크루펌프
스크루펌프

이 구 가운데 하나는 천구(star globe)이고, 다른 하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태양(太陽), 달 그리고 행성들의 움직임을 역학적으로 나타낸 장치이다. 그가 히에론을 위해 만들어진 왕관의 무게를 물 속에서 달아 금과 은의 비율을 측정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지만, 우연히 생각이 떠올라서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Heurēka!)라고 소리치며 거리를 발가벗고 뛰었다는 부분은 통속적으로 꾸며진 것이다.

또한 그 근거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거대한 거울장치를 사용하여 시라쿠사를 포위한 로마 선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와, "나에게 서 있을 자리를 달라, 그러면 나는 지레를 이용해 지구를 움직일 것이다"라고 한 이야기, 그가 수표(數表)를 남길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로마 병사에게 죽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사광학(평면 또는 곡면 거울에서 빛의 반사를 다루는 광학의 한 분야)·역학(力學)·순수수학 등에 대한 그의 실제적인 관심을 통속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는 탁월하며 당대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실용적인 발명에 대한 소신이 매우 약해서 이러한 주제에 관해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구 제작에 관하여 On Sphere-Making〉라는 논문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그의 모든 연구의 특징은 이론적이다. 반면에 역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수학적 사고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론역학과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연구를 집필했을 뿐 아니라 〈역학적인 정리들에 관한 방법 Method Concerning Mechanical Theorems〉(이하 〈방법〉)에서 새로운 수학정리를 발견하기 위한 발견적 방법으로서 역학적인 논법을 사용했다.

그의 업적의 방대함과 독창성에 비해 고대에 끼친 그의 수학에 있어서의 영향은 다소 적다.

구의 표면적 및 부피에 대한 공식과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결과들은 수학적으로 일반화되었으며, 그가 π에 대해 세운 한계의 하나인 22/7는 고대와 중세에 보통의 근사치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의 수학 연구는 다른 사람이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는, 〈방법〉에 표현된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도 고대에 계속되거나 발전되지 않았다. 회전체 부피를 결정짓는 등 그의 업적들을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던 8세기 또는 9세기에 몇몇 수학논문들이 아랍어로 번역될 때까지 발전되지 않았다.

중세 초기의 아랍 수학자들에 의한 몇몇 가치 있는 연구는 이러한 아르키메데스의 연구에 의해 자극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이후 수학자들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16, 17세기에 이르러 그리스에서 유래된 교과서와 그리스어 교과서 초판이 1544년 바젤에서 인쇄되면서 나타났다. 1558년 페데리코 코만디노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많은 아르키메데스의 저서는 그 지식의 전파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것은 요하네스 케플러와 갈릴레오를 비롯한 그당시 가장 유명한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반영되어 있다.

고대의 주석(註釋)들을 포함한 모든 연구들에 대한 데이비드 리볼트의 편집과 라틴어 번역(1615)은 17세기의 몇몇 최고의 수학자들, 특히 르네 데카르트와 피에르 드 페르마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장 뛰어난 아르키메데스를 포함한 고대 수학자들의 연구가 재발견되지 않았다면 1550~1650년 유럽에서의 수학의 발전은 생각할 수 없다. 불행히도 〈방법〉은 아랍과 르네상스의 수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19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재발견되었는데, 만약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들에게 알려졌다면 그들이 새로운 정리들을 발견할 때 자신의 계승자들이 이것을 이용할 것이라는 아르키메데스의 희망이 성취되었을 것이다.

연구

현존하는 9권의 책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2권으로 되어 있는 〈구와 원기둥에 관하여 On the Sphere and Cylinder〉에서 중요한 결론은, 구의 표면적은 그 대원(大圓)의 넓이의 4배(오늘날 표기법으로는 S=4πr2)가 되며 이 의 부피는 그 구가 내접(內接)하는 원기둥 부피의 2/3(부피에 대한 이 공식은 V=4/3πr3으로 표현됨)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다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를 표시해 남길 정도로 후자의 발견에 긍지를 가졌다.

그가 죽은 지 150년 뒤에 키케로가 잡초가 우거진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 〈원의 측정 Measurement of the Circle〉은 원주율 π가 22/7와 223/71 사이에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는 단편 저작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가 고안한 접근방법은 많은 변을 갖는 정다각형을 내·외접시키는 것이며, 17세기 후반 급수전개(級數展開)가 발달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π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이 책에는 3과 몇몇 큰 수들의 제곱근을 정수비로 표현한 정밀한 근사치도 들어 있다.

〈원뿔곡선체와 회전타원체에 대하여 On Conoids and Spheroids〉에서는 원뿔곡선(원·타원·포물선·쌍곡선)을 그 축 주위로 회전시켜 만든 입체의 일부분에 대한 부피를 결정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나선에 대하여 On Spirals〉에서는 아르키메데스 나선(한 고정점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각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직선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한 점의 자취)에 대한 접선(接線)의 많은 성질을 소개했다.

〈평면의 평형에 대하여 On the Equilibrium of Planes〉·〈평면의 무게중심 Centres of Gravity of Planes〉은 직선으로 둘러싸인 여러 가지 평면도형과 원뿔곡선도형의 무게중심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주로 다루었다.

제1권에서는 지레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지레 받침에서 추까지의 거리와 추 무게가 서로 반비례한다는 '지레 법칙'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는 '이론역학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나중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추가되거나 개정되었기 때문에 이 책의 대부분을 믿기는 어렵다. 지레 법칙의 기본원리와 무게중심의 개념은 아르키메데스 이전의 학자들에 의해 수학적 근거를 가지고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공헌은 오히려 이러한 개념을 원뿔곡선까지 확장시킨 것에 있다.

〈포물선의 구적 Quadrature of the Parabola〉은 처음에는 '역학적인' 방법(〈방법〉에서처럼)에 의해, 그 뒤에는 기존의 기하학적인 방법에 의해 직선과 임의의 포물선으로 둘러싸인 넓이가, 그 직선을 밑변으로 하고 곡선부분과 같은 높이를 갖는 3각형의 넓이의 4/3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은 적분(積分) 문제이기도 하다.

〈모래알 계산자 The Sand-Reckoner〉는 비전문가를 위해 씌어진 경구인 소책자(이것은 히에론의 아들 겔론에게 편지로 보내졌음)이지만, 매우 독창적인 수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의 목적은 거대한 수, 즉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모래알의 수를 표시하는 방법을 보임으로써 그리스 수체계의 부적당함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사실 아르키메데스가 한 것은 1억을 밑수로 하는 자리값 기수법을 창조한 것이었다. 그는 60을 밑수로 하는 그당시 바빌로니아 자리값 체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체계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자세한 묘사이며 그가 관측과 도구로 태양의 겉보기 지름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 독창적인 방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를 끈다.

〈방법〉에는 수학에서의 발견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주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 이래 고대로부터 현존하는 유일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몇몇 중요한 발견에 도달하기 위해 '역학적' 방법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하나씩 열거했다. 그 발견 중에는 포물선으로 둘러싸인 넓이와 구의 표면적 및 부피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기법은 직선들로 둘러싸인 도형과 곡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을 각각 무한개이지만 같은 개수의 무한히 얇은 띠로 나누는 것이다. 이 띠들의 각 대응쌍을 가상의 저울로 서로의 '무게'를 재고, 이들을 더해서 두 도형의 비를 구한다. 이 방법은 경험적 방법으로는 유용하지만 엄격한 증명을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2권으로 된 〈부유체에 대하여 On Floating Bodies〉는 일부가 그리스어로 남아 있으며, 그 나머지는 그리스어에서 중세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창시자로 알려진 유체정역학에 관한 최초의 저서이다. 이 책의 목적은 여러 가지 고체가 유체 속에 떠 있을 때 그들의 형태와 비중(比重) 변화에 따라 고체가 취하는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제1권에서는 여러 가지 일반 원리들이 입증되었는데, 특히 7번째 정리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로 알려져 있다.

이 원리는, 유체보다 밀도가 더 높은 고체가 그 유체 속에 있을 때 고체는 그것이 차지한 유체의 무게만큼 더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제2권은 고대의 그 어느 고전과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이후의 어느 저서와도 견줄 수 없는 수학의 대걸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직각 회전포물체(回轉抛物體)가 비중이 더 큰 유체 속에 있을 때 기하학적·유체정역학적 변화에 따라 취하는 안정성의 서로 다른 위치를 결정하고 있다.

이후 저술가들의 참고문헌에 의하면 그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다른 많은 저서를 집필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흥미있는 것으로는 반사광학과 동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구에 내접 가능한 정다각형으로 둘러싸인 13반(半)정다면체(아르키메데스 다면체), 그리고 부정해석학에서의 미지수 8개의 문제로 그리스 풍자시에 전해오는 '소몰이 문제'에 관한 책들이다. 이외에도 '아르키메데스적인' 요소들이 포함된 그의 몇몇 연구들이 아랍어 번역본에 남아 있으나 그의 작품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정7각형을 원에 내접시키는 것에 관한 연구, 정리를 증명할 때 참(true)으로 이용되는 명제인 예비정리들과 〈원과의 접촉에 관하여 On Touching Circles〉라는 책(둘 다 초등 평면기하학과 관련 있음), 그리고 게임이나 수수께끼를 위해 14개의 조각으로 분할된 정4각형을 다루는 '스토마키온'(그 일부가 그리스어로 된 것으로 현존함)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수학적 증명과 표현에는 한편으로는 사고의 대담성과 독창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극히 엄격함이 나타나 있는데, 그당시 기하학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방법〉에서 무한소(無限小)와 관련된 '역학적인' 논법으로 구의 표면적과 부피에 대한 공식을 이끌어낸 반면, 〈구와 원기둥에 관하여〉에 있는 이 공식에 대한 실제 증명에서는 단지 BC 4세기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가 고안한 극한(極限)과 관련된 엄격한 방법을 사용했다. 아르키메데스가 정통한 이러한 방법은 적분문제를 다루는 고등기하학에 관한 자신의 모든 연구에 쓰인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것들의 수학적 엄격함은 무한소가 수학에 다시 도입되었을 때인 17세기에 적분학을 시작한 사람들의 '증명'과 크게 대조된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의 결론도 이들 못지 않게 인상적이다. 이같이 기존의 사고방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근대 이전에 전대미문의 수체계 성질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 〈모래알 계산자〉의 산술적 부분에 명백히 나타난다.

그는 또한 고대의 뛰어난 천문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지점(solstice) 관측은 고대의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 히파르코스에 의해 사용되었다. 〈모래알 계산자〉에 그의 예리한 천문학적 흥미와 실제적인 관측 능력이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면에서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구한 지구에서 여러 천체까지의 거리 수치들이 전해지는데, 천문관측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행성들 사이의 거리가 음정(音程)과 연관된다는 '피타고라스' 이론을 바탕으로 했다.

실지 천문학자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형이상학적 생각이 발견되지만, 아르키메데스에게 그 근거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