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스틸

다른 표기 언어 Sir Richard Steele
요약 테이블
출생 1672, 더블린
사망 1729. 9. 1, 웨일스 카마던셔 카마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수필가·극작가·언론인·정치가.
필명은 Isaac Bickerstaff.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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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작품
  3. 완숙기의 삶과 작품
  4. 스틸에 대한 평가

개요

정기간행물 〈태틀러 The Tatler〉·〈스펙테이터 The Spectator〉의 주요필자로 조지프 애디슨과 더불어 잘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초기생애와 작품

병약하고 다소 무능한 사무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스틸이 5세 되던 무렵에 죽었다.

〈태틀러〉지 181호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적혀 있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오먼드 공작의 신임받는 비서였던 숙부 헨리 개스코인의 보호를 받았는데, 스틸의 기록에 따르면 공작의 장려금 덕택에 '폭넓은 교양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1684년에는 영국에 와서 차터하우스 스쿨에서 공부했으며, 1689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로 옮겼다. 차터하우스에서 조지프 애디슨을 만남으로써 영국 문학사상 가장 유명하고 유익했던 교우관계 가운데 하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719년 애디슨이 죽기 직전, 주로 정치적인 의견차 때문에 사이가 벌어져서 끝내는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 1691년 머튼 칼리지로 옮겼으나 윌리엄 왕의 대(對) 프랑스 전쟁 열기에 휩쓸려, 1692년 학위도 받지 못한 채 공부를 그만두고 입대했다. 군인생활을 본업으로 할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한데, 1697년에 임관하고 1699년에는 대위로 승진했으나 그 이상의 승진에 필요한 돈과 연줄이 없었던 바람에 1705년 제대했다.

스틸은 그 사이에 작가라는 2번째 길로 들어섰다.

1700년 동료장교와 결투에서 그에게 심한 부상을 입혔던 경험과 군대생활의 '부패'에 대한 역겨움이 동기가 되어 쓴 도덕론 〈그리스도교의 영웅 The Christian Hero〉을 1701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도 10판이나 찍어냈다. '종교의 원칙만이 위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 이 논문 때문에 스틸은 위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으며, 정작 자신은 먹고 마시기를 즐겨 하면서 입으로는 금욕을 가르친다고 조롱받았다.

그러나 스틸이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착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긴 했지만 그는 분명히 진지했으며, 이 초기 작품을 보면 그가 뒷날 쓰게 될 글의 상당부분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동료 장교들의 비웃음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결국은 문학의 재능을 전혀 다른 분야로 돌려, 같은 해(1701) 첫 희극 〈장례식 The Funeral〉을 썼다.

이 작품이 드루어리레인 극장에 올려져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 덕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윌리엄 왕과 휘그당 지도자들의 눈길도 끌게 되었다. 〈장례식〉의 다음 작품으로 1703년말에 발표한 〈거짓말쟁이 연인 The Lying Lover〉은 그의 희곡 가운데 유일한 실패작으 로 불과 6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는데, 스틸의 말에 따르면 이는 "경건하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설교투에다가 구성이 엉망이고 딱딱한 훈계로 가득한 이 작품은 그래도 최초의 감상적 희극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문학사에서 중요하다. 결투에 대한 저항심, '여성'에 대한 엄숙하고 애정어린 경의, 쉽게 속아넘어가는 저자가 최근 연금술 연구계획에 많은 돈을 날렸다는 암시 등은 스틸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스틸은 사실 무슨 건수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까닭에, 언제라도 돈벌이가 될 만한 사업을 구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717년부터는 특별히 건조한 배로 살아 있는 생선을 수송하는 계획에 많은 시간·노력·돈을 쏟았다.

애디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쓴 3번째 희곡 〈자상한 남편 The Tender Husband〉(1705)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스틸은 계속해서 출세와 돈을 추구했다. 그뒤 몇 년 동안 여왕의 남편 조지 공의 시종을 비롯해 여러 말단 관직을 얻었으며, 1705년에는 바베이도스에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던 마거릿 스트레치라는 미망인과 결혼했다.

이 결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재산에 끌려 결혼했음이 분명하다. 이 재산은 결혼 직후 그의 빚에 얽혀들게 되었으나(1706년 빚 때문에 제기된 2차례의 소송에서 져 손해배상금을 지불함), 1706년말 스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마거릿이 죽으면서 남편에게 상당한 수입을 남겨주었다. 마거릿이 죽은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혼했는데, 이번에도 상대는 돈 많은 여자였으나 결혼의 성격은 초혼과 매우 달랐다.

'사랑하는 프루'라고 부른 메리 스컬록은 비록 스틸이 이따금 내팽개쳐두기는 했으나 그의 열렬한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와 메모는 11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드러난 그의 인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메리는 4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맏이인 엘리자베스만 빼고 모두 스틸보다 먼저 죽었으며 다섯째 아이를 갖고 있던 1718년에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완숙기의 삶과 작품

앤 여왕 재위 초기에 스틸이 맡았던 다른 중요한 직책은 정부의 공식 기관지인 〈런던 가제트 London Gazette〉에 글을 쓰는 기자였다.

이 직책은 휘그당 지도자들과 친분을 강화해주었으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1709년 4월 12일 매주마다 3번씩 발행되는 평론지 〈태틀러〉를 창간함으로써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풍자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사용해서 이미 유명해진 바 있는 아이작 비커스태프라는 필명으로 이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오락성과 교훈성을 함께 갖추고 있었는데, 그러한 점들은 뒷날 〈스펙테이터〉지에서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전체적인 목적은 진실·순수함·명예·미덕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고 썼다. 그뒤의 잡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강한 윤리성·우정·솔직함·자비심 같은 소박한 미덕에 대한 애착, 쉬운 구어 표현과 경쾌한 문체 때문에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는 진지한 접근방식을 엿볼 수 있다.

애디슨이 약 46편의 논문을 기고하고 다른 사람들도 글을 썼으나, 271호라는 엄청난 양은 스틸 혼자서 발행한 것이었다. 이 잡지는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태틀러〉가 폐간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주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710년 권력이 휘그당에서 토리당으로 옮겨가자 휘그당원이었던 스틸은 관보기자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인지국장 자리마저 잃을 뻔했다. 〈태틀러〉에는 정치적 암시가 많았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토리당 지도자 로버트 할리를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에, 할리가 스틸에게 이 잡지를 폐간하도록 압력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1711년 3월 1일 첫선을 보인 〈태틀러〉의 후속지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스펙테이터〉는 합작사업이었는데, 스틸이 독창적인 언론인의 기질을 더 많이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는 애디슨이 자기 방식대로 이끌어가는 경향을 보였지만, 당시의 유명인사(로저 드 코블리 경 등)와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스틸이었다. 매력적이고 때로는 격의 없는 스틸의 문체는 애디슨의 좀더 갈고 다듬은 박식한 글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555호까지 발행되는 동안 스틸은 251호에 기고했고 2/3 정도는 투고자의 글로 채워졌다(→ 저널리즘).

그뒤 발행한 많은 정기간행물 가운데 〈잉글리시먼 The Englishman〉을 비롯한 몇 가지는 정치면에서 당파적 색채가 짙었다.

주로 애디슨이 기고한 〈가디언 The Guardian〉지에는 스틸의 가장 뛰어난 글 가운데 일부가 실려 있으며, 〈러버 The Lover〉에는 그의 가장 매력적인 평론 40편이 실려 있다. 그밖에도 단명한 정기간행물 〈리더 The Reader〉·〈타운 토크 Town-Talk〉·〈플리비언 The Plebeian〉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글들이 실렸다.

야당인 휘그당의 실질적 대변자(1710~14)가 되어 원칙과 정직함이 남달리 돋보이는 글을 썼다. 마지막 정기간행물이자 넓은 의미의 마지막 문학작품은 〈시어터 The Theatre〉였다. 정치와 관련된 글들이 많은 파문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1713년 인지국장 자리에서 물러나 하원의원으로 뽑혔으나, 토리당을 공격하는 논설문 〈던커크의 중요성 재고(再考) The Importance of Dunkirk Consider'd〉·〈위기 The Crisis〉가 빌미가 되어 '선동적인 글'을 썼다는 이유로 하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삶은 평탄해지고 보상까지 뒤따랐다. 1714년에는 취미에 맞는 데다가 돈벌이까지 잘 되는 드루어리레인 극장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1715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하원의원으로 다시 뽑혔다. 쾌락을 좇아서 무절제한 생활을 한 까닭에 건강이 차츰 나빠져 이미 오래 전부터 풍에 시달렸던 스틸은, 그러면서도 하원의원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드루어리레인 극장의 운영에도 참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극장의 번영에 기여한 큰 공로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이자 최대의 성공을 거둔 희극 〈남의 눈을 의식하는 연인들 The Conscious Lovers〉이다.

이 작품은 18세기 최고의 인기작 가운데 하나이자 영국 감상희극의 가장 뛰어난 본보기이다. 1724년 일선에서 물러나 웨일스에 있는 죽은 아내의 영지로 가 빚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말년은 평온했으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스틸에 대한 평가

스틸은 한 개인으로나 작가로나 당대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이해하기 쉽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되는 대로 쓴 것 같으나 매우 진지한 많은 글이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산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그는 천성적으로 매우 너그럽고 인간에 대한 넓은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썼다. 감정에 이끌리고 성급하며 선량하고, 이상을 좇았던 그는 언제나 돈을 버는 것보다 간수하기를 더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산더미 같은 빚 속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다급함에 쫓겨다닌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