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디슨

애디슨

다른 표기 언어 Joseph Add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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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72. 5. 1, 잉글랜드 윌트셔 밀스턴
사망 1719. 6. 17,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수필가·시인·극작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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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관직생활
  4. 토리당 집권시기
  5. 후기

개요

리처드 스틸과 함께 잡지 〈태틀러 The Tatler〉·〈스펙테이터 The Spectator〉를 주관했으며 주요기고가였다.

문체가 뛰어나 휘그당 집권 당시 여러 요직에 등용되었다.

초기생애

코번트리 대성당 참사회원과 리치필드의 참사회장을 지낸 랜슬롯 애디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에임즈베리·솔즈베리·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에서 학업을 마친 후 14세 때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뒷날 그와 문학 공저자가 된 리처드 스틸과의 평생 동안 계속된 우정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옥스퍼드로 갔고 애디슨은 1687년 6월 그곳의 퀸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1689년에는 모들린 칼리지의 장학생으로 뽑혔고 1693년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697~1711년 특별연구원을 지냈고, 학자와 문학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모들린 칼리지에서 10년간 강사를 했다.

1695년 영향력있는 휘그당 정치가 키퍼 소머스 경에게 헌정한 〈폐하(윌리엄 3세)께 바치는 시 A Poem to his Majesty〉는 소머스뿐만 아니라 후에 핼리팩스 백작이 된 찰스 몬터규의 주목을 끌었다. 몬터규는 애디슨에게서 왕권에 크게 도움이 될 문필가로서의 자질을 발견했다. 국고 보조로 관직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의 라틴 시 중 많은 부분이 스스로 편집한 〈영국 시선집 Musarum Anglicanarum Analecta〉(1699)의 제2권에 수록되었다.

1697년 존 드라이든의 위대한 번역 작품인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Georgica〉에 서문을 써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유럽 여행(1699~1704)을 통해 해외 주재 영국 외교관들을 알게 되었고, 당대 유럽 문필가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고대 로마 시인들의 활동 배경을 직접 관찰할 수도 있었다. 파리에서 그가 보낸 편지에는 당대 최고의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였던 부알로, 철학자 니콜라 말브랑슈 등과 같은 유명 인사를 방문했던 사실과 프랑스 희곡이나 오페라에서 그가 받은 인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1701년 이탈리아를 한가하게 여행하면서 후에 그의 〈이탈리아 기행 Remarks on Several Parts of Italy〉(1705, 개정판 1718)에 나오는 호라티우스·베르길리우스·클라우디아누스·실리우스·이탈리쿠스 등이 살았던 시기의 고대 유적·산·강·동상·그림·메달 등을 구경했다. 핼리팩스 경에게 보낸 시 형식의 편지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 A Letter from Italy〉(1704)에서는 그가 이러한 '시의 현장들'을 조감하며 느낀 기쁨이 기록되어 있다.

소머스 경에게 보낸 산문 형식의 〈기행 Remarks〉에서는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 외에도 대다수 국민이 빈곤한 데 비해 교황에게만 부가 집중되어 있는 사실과, 독재 권력에 대한 진정한 휘그 당원으로서의 증오가 표출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몽세니의 알프스 산맥을 타고 스위스로 갔으며, 제네바에서 1702년 3월 윌리엄 3세의 사망으로 인해 그의 유력한 후원자인 소머스와 핼리팩스가 실권하게 된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여름 내내 스위스에 머물면서 빈·드레스덴을 거쳐 미래의 영국 왕 조지 1세의 어머니인 소피아를 만나기 위해 하노버를 방문하고 함부르크를 경유하여 네덜란드에 갔다.

그곳에서 근 1년을 한가롭게 지내면서 1704년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피에르 과 같은 문학가들을 방문했고, 당시 벨의 〈역사와 비평의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영어판 초판 발간을 준비중이었던 출판업자 제이콥 톤슨을 비롯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고 있는 영국인들을 만났다.

관직생활

런던에서 애디슨은 소머스와 핼리팩스, 그리고 톤슨이 설립한 영향력있는 휘그당 지도자와 당대의 문학가들로 구성된 모임인 킷캣 클럽의 회원들과 우정을 재개했다.

그 모임의 회원으로는 스틸, 윌리엄 콘그리브, 존 밴브러 경, 새뮤얼 가스 경 등이 있었다. 그해 8월 영국은 말버러 공작이 블렌하임에서 프랑스를 대패시켰다는 소식으로 들떠 있었으며 그는 정부 지도자로부터 이 큰 경사에 걸맞는 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블렌하임 전투). 이 시 원고를 완성하기도 전에 그는 존 로크가 죽어서 비어 있던, 일거리가 별로 없는 한직인 면허세 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말버러에게 보내는 형식의 〈전투 The Campaign〉는 1705년 12월 14일에 출판되었으며, 바로 그날 말버러 백작이 런던으로 개선했다. 관습적·고전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새뮤얼 존슨 박사는 이를 "허구에 대한 합리적이며 용감한 거부"라고 칭함) 말버러의 군사적 천재성을 효과적으로 그려내어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해에 제3판까지 팔렸는데, 국가의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1705년 5월 선거에서 휘그당이 승리함으로써 소머스와 핼리팩스가 추밀원에 복직되었으며, 애디슨은 연수입이 500파운드 이상 되는 행정부의 요직 남부 차관에 임명되어 재정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화이트 홀에 있는 정부 관청 칵핏에 사무실을 갖고 해외의 외교관들과 편지 왕래를 하고 국내의 다양한 업무를 하는 등 분주하고 부수입이 높은 직책이었다. 1706년초 앤 여왕이 죽은 후 하노버 왕가 계승을 위한 왕위계승법에 대한 세부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핼리팩스를 동반하고 하노버 왕정으로 갔다. 하노버와 네덜란드에서 벨,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 그밖의 문인들과 재회했다. 1706년 가을 더욱 막강한 권력으로 새롭게 재정비한 휘그당 행정부에서 그의 직위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그가 관직에서 더욱 부상하리라는 예고였다.

그당시 그는 스틸이 〈자상한 남편 The Tender Husband〉(1705)을 쓰는 것을 도와주고 서막까지 써주며 스틸을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

그 희곡을 출판할 때 스틸은 '영원한 우정'을 기려 그 작품을 그에게 헌정했다. 애디슨은 스틸을 런던 관보 〈가제트 Gazette〉의 편집자로 임명하거나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려주는 등 실질적인 면에서도 그를 도왔다. 게다가 차관으로서 그에게 기사거리를 자주 제공해주었다. 그는 1707년 여름 내내 스틸과 함께 살다가 9월에 스틸이 결혼하자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에 도전하기 위해 '아름다운 로자먼드' 전설을 중심으로 한 영어 오페라를 썼는데 배경은 말버러의 블레넘 궁전이 있는 우드스톡 공원이었다.

음악은 〈키프로스의 여왕 아르시노이 Arsinoe, Queen of Cyprus〉의 작곡가 토머스 클레이턴에게 맡겼으나 불행히도 이는 현명하지 못한 선택으로 판명되었다. 〈로자먼드〉는 1707년 3월 4일 드루어리 레인 극장에서 막이 올랐으나 단지 3일밤 공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오페라 대본은 훌륭했고 가사는 경쾌하고 인상적이었다. 18세기 후반에 토머스 오거스틴 아른이 새로 음악을 맡자 그 작품은 사실상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1708년 콘월 주 로스트위시엘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신임 아일랜드 총독인 워턴 공작의 비서관이 되었다.

애디슨의 직위는 사실상 연봉 약 2,000파운드로 아일랜드 내무장관 수준이었다. 그에게는 아일랜드 비서관으로서 해야 할 일반업무 외에도 아일랜드에서 시행되는 수많은 공공정책을 통치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심사율(審査律:공무원이 되는 사람에게 국교 신봉의 선서를 시킨 규정)이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항하는 법률, 프로테스탄트 궁내관들에 대한 조치 등 여러 가지 미묘한 문제에 재치 있고 과단성 있는 능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는 1709년 5월 15일 캐번을 대표하는 아일랜드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또한 아일랜드 공문서 보관 관리에 관심을 갖고 버밍엄 탑에 기록보관 사무실을 구입하여 연봉 400파운드가 되는 중요 관직으로 발전시켰다.

1709년 4~9월, 1710년 5~8월에는 더블린 성에서 기거하고, 겨울 몇 달 동안은 영국에서 지내며 워턴이 총독으로 있던 2년 동안 아일랜드 비서관으로 일했다.

아일랜드 비서관으로 일하던 바로 그 기간에 그의 친구 스틸은 아이작 비커스태프라는 필명으로 1주일에 3번 발행하는 잡지 〈태틀러 The Tatler〉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창간호는 애디슨이 아직 잉글랜드에 머물던 1709년 4월 12일에 나왔으나, 그는 아일랜드에 머무는 중에도 이 새로운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1709년 9월 런던으로 돌아와 1711년 5월 아일랜드로 돌아가기 전, 1709~10년 겨울에 그의 대부분의 수필을 썼다.

토리당 집권시기

1710년은 휘그당이 권력에서 밀려나고 토리당이 선거에서 크게 승리한 중요한 해였다.

애디슨은 이번에는 윌트셔 주 맘즈베리 시 대표로서 하원 의석을 쉽게 다시 차지했으나 오래 전부터 그를 강력히 뒷받침해주던 후원자들에게 다시 인기를 잃고 있었다. 그는 1705년 비서관으로 임명된 후 처음으로 실직상태에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문학 활동에 바칠 수 있었으며, 스틸이나 다른 킷캣 클럽 회원들과, 그리고 짧은 기간이나마 조너선 스위프트와 우정을 돈독히 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스위프트가 부상하는 토리당 지도자들에게 충성하게 되자 그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스틸이 1711년 1월 2일 〈태틀러〉를 폐간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 잡지에 기고했다.

스틸이 신흥 토리당 정부를 비난해서 비판받은 점 외에 〈태틀러〉는 애디슨의 도움으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말 스틸은 〈태틀러〉의 합본판에 쓸 만한 충분한 자료를 갖추게 되었고, 두 사람은 새로운 정기간행물로 새 출발을 하기로 결정했다. 1711년 3월 1일부터 1712년 12월 6일까지 1주일에 6번 발간된 〈스펙테이터〉는 최신 패션에 대한 기사로부터 애디슨이 주 1회 게재하는 〈실락원 Paradise Lost〉에 관한 평론과 '상상력의 즐거움'을 언급하는 연속물 등 비평과 도덕성을 다룬 깊이있는 논문에 이르기까지 독자에게 광범위한 내용을 제공했다.

배움의 장소를 '서재·도서관·학교·대학 등으로부터 클럽·모임·식탁·다방 등으로' 옮기면서 〈스펙테이터〉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독자들이 보낸 매우 다양한 편지들과 꾸준히 늘어나는 인쇄 광고의 수에서도 증명되었다. 3,000부 이상이 매일 간행되었으며 555호는 7권으로 합본되었다. 2년 뒤(1714. 6. 18~12. 20) 애디슨이 두 조수의 도움을 받아 80호를 더 간행했으며 이것은 후에 8권의 합본으로 재발간되었다.

토리당이 집권하던 정치적으로 황폐했던 시기에 애디슨이 내놓은 주목할 만한 다른 문학작품으로는 비극 〈카토 Cato〉가 있다.

1713년 4월 14일 드루어리 레인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아마도 양당 모두가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함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휘그당의 입장에서 〈카토〉는 프랑스 압제에 대항하는 단호한 자유수호자처럼 보였다. 반면 토리당은 독재자 카이사르를 군사적 승리로 영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로마의 말버러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713년 4~5월에 경이적으로 20회 공연을 했으며 그해에 8판의 책이 팔렸고, 18세기 내내 공연되고, 읽히고, 인용되었다.

후기

1714년 8월 1일 앤 여왕이 죽고 조지 1세가 즉위하게 되자 애디슨의 정치적 지위는 상승했다.

그는 신임 국왕이 하노버에서 도착할 때까지 통치했던 섭정의 비서관으로 일했고, 1717년 4월 국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 국무에 매진할 수 없었던 관계로 그 다음해에 그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런가 하면 워릭 백작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켄징턴의 홀랜드 하우스에서 비교적 여생을 풍요롭게 보냈다. 정치적 수필 연재물 〈자유 수호자 The Free-Holder, or Political Essays〉가 1715년 12월 23일부터 1716년 6월 29일까지 간행되었으며 희극 〈북치는 사람 The Drummer〉은 1716년 3월 10일 드루어리 레인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귀족의 지위를 제한하려는 선더런드 경의 법안에 대해 애디슨과 스틸이 서로 반대 입장에서 벌인 논쟁으로 애디슨은 불행히도 말년에 스틸과 불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그의 오랜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핼리팩스 경의 묘지와 멀지 않은 곳에 묻혔다. 작가로서 그는 18세기의 위대한 비극 중의 하나인 〈카토〉를 창작해냈으며 자신이 발행했던 〈스펙테이터〉를 통해 연재 수필을 완벽의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공직자로서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1688년의 혁명으로 확립된 헌법원리를 더욱 확고히 하려고 노력한 휘그당의 영향력있는 지지자가 되었으며 조지 1세 치하의 국무장관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라틴 시와 영시 작가로서 일찍이 명성을 얻었으나 휘그당 지도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블렌하임 전투를 다룬 시였으며 그것은 그의 관직과 문학적 명성으로의 길을 터주었다. 존슨 박사가 〈스펙테이터〉를 산문 형식의 본보기로서 평가함에 따라 애디슨은 산문 언어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