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버러

말버러

다른 표기 언어 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
요약 테이블
출생 1650. 5. 26, 잉글랜드 데번 애시
사망 1722. 6. 16, 런던 근처 윈저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유명한 장군.
Marquess of Blandford, Reichsrürst Von Mindelheim, Baron Churchill of Aymouth(1682~85), Baron Churchill of Sandridge(1685~89), Earl of Marlborough(1689~1702)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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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군경력
  3. 정치적 흥망
  4. 말버러에 대한 평가

개요

프랑스 루이 14세와의 전쟁에서 영국군과 그 동맹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블렌하임 전투(1704), 라미예 전투(1706), 오우데나르데 전투(1708) 등이 유명하다.

군경력

하원의원이었던 윈스턴 처칠 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윈스턴 처칠 경은 소유재산은 많지 않았으나 찰스 2세의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을 왕실과 군대에 두루 진출시킬 수 있었다.

장남인 말버러는 궁정과 군대에서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재력과 가문을 무시하고 사랑하는 여인(물론 미모에 반해서)과 혼인함으로써 생애 전반에 걸쳐 공직생활의 수입에만 매달려 지낼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당시에는 출세한 장군이 근대의 재산투기꾼들처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재물을 모으는 것은 정상적이고 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수만 명의 병사에게 식량과 장비를 지급하고 그만한 수의 말을 먹여야 하는 전쟁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유럽 열강들이 루이 14세의 세력강화를 우려해 벌인 전쟁 초반국면에서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중장으로서 사실상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찰스 2세 치하에서 귀족이었지만 전쟁에 참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재산을 모으지 못했다.

1688년 가톨릭교도였던 제임스 2세가 축출된 명예혁명의 과정에서 그는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겠다는 확약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는 정치적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오라녜 공은 영국에 도착한 지 3주 만에 윌리엄 3세로 즉위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윌리엄으로부터 말버러 백작작위를 받았으며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군대에서 지위도 인정받았으며 1689~91년 플랑드르와 아일랜드 주둔군 사령관직도 유지하면서 꾸준히 승승장구해나갔다.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인생의 전성기에서 최고의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으나 1691년말 모든 관직에서 갑자기 해임당했다. 이듬해 5월 제임스 2세의 왕위회복을 꾀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이 음모는 그해 여름 셰르부르로부터 침공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제임스 2세의 왕위회복을 노린다는 계획이었다. 그후 곧 풀려났지만 그는 3년 동안 왕실의 눈밖에 나 있었으며 그후의 전쟁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신뢰할 만한 인사들은 그가 반역음모에 가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생애 동안 벌써 2번씩이나 체제전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제임스 2세에게 듣기 좋은 약속을 하는 등 당대 모든 유력 정치인들과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윌리엄과 말버러 사이의 불화는 반역음모에 대한 의심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버러가 윌리엄의 총애를 받던 네덜란드 출신의 신하들과 대립하는 상당히 많은 영국인들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었다.

1701년 루이 14세는 공위가 된 스페인 제국과 그 왕위를 전쟁을 통해 확보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병중에 있으면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윌리엄 3세는 루이 14세의 야욕에 맞선 싸움에 말버러를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에서처럼 영국에 와서도 프랑스의 야심에 맞선 싸움에 전생애를 바친 인물이었다. 윌리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앤 여왕으로부터 앞서 받은 임명을 확인받은 말버러는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그리고 원군 병력을 이끌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10번의 전투를 지휘했다. 첫번째 전투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군사기술을 발휘했으며 이는 나폴레옹이 출현할 때까지 누구도 필적하지 못할 명성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윌리엄 3세는 전투가 끝날 무렵 그에게 공작작위를 내렸다. 말버러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통치자였던 루이 14세의 야심에 맞서 크고 작은 나라들이 참가하는 대동맹을 탄생시키고 이를 유지해 나가는 등 외교관으로서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대동맹 전쟁).

정치적 흥망

영국에서도 말버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로부터 지지를 얻는 일이 모든 대신들에게 필수적인 일이었다.

이 같은 영향력의 이면에는 미모의 아내 새러 제닝스가 있었다. 새러는 여왕의 확고한 친구였으며 지난 20년간 모든 정치적 격동 속에서 앤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다. 앤 여왕은 확고한 견해와 나름대로의 편견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당분간 새러의 남편 말버러와 그녀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자인 고돌핀 백작 시드니에게 자신이 할일을 내맡겨 두고 만족하고 있었다.

앤 여왕은 고돌핀 백작을 재무장관과 실질적인 총리의 자리에 앉혔다. 말버러와 고돌핀은 전형적인 토리 당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뿐만 아니라 왕실에 대한 확고한 지지세력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처음에 로버트 할리와 제휴했다. 로버트 할리는 후에 옥스퍼드 공작 1세가 된 인물이며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재정적 이해관계에 반감을 품은 토리당 내 새로운 세력의 지도자였다. 말버러·고돌핀·할리 세 사람의 제휴는 루이 14세와 전쟁을 치르는 데 힘이 되었으며 블렌하임과 라미예에서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점차 토리당 인사들이 하나 둘씩 정부를 떠나게 되자 말버러와 고돌핀은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전쟁 지지를 휘그당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다. 새러는 휘그당과 제휴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그결과로 휘그당 지도자들을 매우 혐오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앤 여왕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급속히 줄었다.

1708년 1월에 정치적 위기가 닥쳐와서 할리가 해임되었으며 이제 말버러와 고돌핀은 전적으로 휘그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말버러는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휘그당은 평화를 확보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영국 국민들은 전쟁에 실증을 느낀 나머지 1710년 총선거에서 고돌핀과 그의 휘그파 동료들을 해임한 앤 여왕의 조치를 지지했다. 말버러는 그대로 1년을 더 육군 사령관직에 남아 있었지만 휘그파의 득세 속에 이미 자신이 점차 고립상태에 빠져 있으며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새 정부에 의해 추진되던 평화협상의 조건 문제에서 나름대로 정치적 입장을 취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1711년 하원에서 그의 공금 횡령 혐의가 제기됨에 따라 모든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하원으로부터 비난을 받자 그는 해외로 떠나버렸으며 앤 여왕 치하에서는 더이상 공직에 나오지 않았다. 조지 1세 때 다시 왕실의 총애를 회복했으나 이미 병중에 있었으며 1722년 런던 근처 윈저에서 사망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며 지냈다.

말버러에 대한 평가

그의 출세가도는 실망스럽게 끝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의 작가들이 그의 위대함을 당연히 인정하기를 꺼렸던 이유로 충분하지 않다. 조너선 스위프트, 알렉산더 포프, 윌리엄 새커리, 토머스 매콜리 등은 말버러를 무자비하게 비판했던 두드러진 작가들이다.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게 되는 근거는 말버러의 경력이 보여주는 복잡한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말버러는 한 사람의 군주인 제임스 2세를 저버렸으며, 두 사람의 다른 군주인 윌리엄 3세와 앤 여왕으로부터는 불명예스럽게 쫓겨났다. 더욱이 대중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윌리엄 3세 때 반역음모 혐의를 받았으며 앤 여왕 치하에서는 의회로부터 공금횡령 혐의를 받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같은 에피소드를 중시했으며 또한 제임스 2세의 정부였던 그의 누이가 궁정에서 그를 급속히 출세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33년 윈스턴 처칠 경이 자신의 유명한 선조인 말버러에 관한 전기를 펴낼 때까지 말버러의 개인적·정치적 명망은 대체로 매콜리가 기술한 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처칠 경은 말버러의 반역과 부정에 관한 주장들이 그가 당대 인사들과 맺었던 오랜 교분 및 정치적 유대관계와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지적함으로써 말버러에 대한 중상을 늘어놓은 사람들을 쉽게 반박했다.

말버러의 동시대 인물들은 대부분 그에 대한 신뢰할 만한 평가를 내리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말버러의 위대한 군사적 업적이나 1708년 이후 그가 말려든 격렬한 정치적 논쟁만이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더욱이 아내 새러가 처음에는 앤 여왕과, 그리고 나중에는 거의 모든 사람과 불화를 빚은 사실은 그의 명성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말버러의 동시대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길버트 버넷 주교(1643~1715)가 〈그 자신의 시대에 관한 역사 History of His Own Time〉라는 책에서 말버러 공작의 성격에 관한 중립적이면서 수긍할 만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말버러의 매력적인 외모와, 정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가 지닌 우수한 지적인 능력과 기억력, 그리고 사물에 대한 재빠른 이해력 등을 지적했다. 따라서 말버러는 성공한 궁정신하로서 모든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재산이 없는 대신 이같은 특성과 자신 앞에 놓인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해나갔다. 말버러는 공직생활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한 다음에도 이같은 방책을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이는 그의 명성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버넷 주교는 끝으로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는 그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러한 평가는 본질적으로 정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