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테이터

스펙테이터

다른 표기 언어 The Spectator

요약 런던에서 발행된 정기간행물. 평론가인 리처드 스틸 경과 조지프 애디슨이 1711년 3월 1일~1712년 12월 6일에 일간지로 발행했으며, 이어서 1714년 애디슨이 복간했다(80호로 종간됨). 이 신문은 1709년 스틸이 발족시킨 간행물인 〈태틀러 The Tatler〉를 계승한 것이다.

"기지로 도덕을 활성화하고, 도덕으로 기지를 부드럽게 한다"는 목적하에서 이 신문은 '스펙테이터 클럽'을 통한 소설적인 표현방식을 채택했으며, 이 클럽에 속한 가상의 회원들이 기고자들의 사회에 대한 생각을 옹호하는 식으로 꾸몄다. 회원들은 상인, 군인, 도시의 대표(각각 앤드루 프리포트 경, 센트리 대위, 윌 허니컴)와 시골의 신사계급 대표(로저 드 커벌리 경)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런던 현장의 '관찰자'인 스펙테이터 명의로 기사가 씌어졌다. 이 신문의 논조와 의견은 휘그당과 같았으나, 당의 정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회적이었다.

이 신문의 소설적인 구조 때문에 때로 〈스펙테이터〉는 18세기 영국 소설을 부흥시킨 선구자로 평가되지만, 이것은 아마 과대평가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틀은 그것이 채택된 다음에는 1차적인 중요성을 잃고 대신 진지하고 유머러스하며 유연한 어조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사회의 축소판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논문의 진짜 저자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주제에 대해서 소설적인 틀 속에서(제113호에 나타난 로저 경의 결혼관에 대한 스틸의 설명에서처럼), 또는 소설적인 틀에 구애받지 않고(제267·273호 등에서 보인 밀턴의 서사시 〈실락원 Paradise Lost〉에 대한 애디슨의 비평에서처럼) 자유롭게 의견을 펼쳤다.

애디슨과 스틸 외에도 알렉산더 포프, 토머스 티켈, 앰브로스 필립스 등이 글을 기고했다. 평론가로서 애디슨은 스틸보다 훨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스펙테이터〉의 성공에 보다 크게 기여한 것은 그들의 개별적인 기고가 아니라 두 사람의 공동노력이었다. 스틸의 우호적인 논조가 애디슨의 보다 초연한 문체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그것을 보강해준 것이다.

이들의 공동업적은 종교적·정치적 당파성의 영역에서 진지한 토론을 끌어내어 그것을 유한계급의 정상적인 소일거리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들은 함께 간행물의 형태를 정했고, 그 세기의 나머지 기간에 계속 이 간행물이 인기를 누리게 했으며, 새로운 종류의 산문은 아무리 재미있게 쓴다고 해도 진지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소설가들을 잘 수용할 수 있는 대중을 창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