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셀

베셀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Wilhelm Bessel
요약 테이블
출생 1784. 7. 22, 브란덴부르크 민덴
사망 1846. 3. 17,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국적 독일

요약 약 5만 개의 별의 위치를 측정해 처음으로 태양을 제외한 다른 별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구했다. 또한 지구의 모양, 크기 및 임의 지점의 위치를 구하는 방법을 연구는 측지학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15세 때 수출입 회사에 입사해 언어, 지리, 항해원리 등을 공부했던 것이 천문학과 수학을 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1607년의 핼리 혜성 관측자료를 이용해 그 궤도를 계산한 논문을 혜성 연구의 1인자인 올베르스에게 보냈던 것을 계기로 릴리엔탈 천문대에서 일하게됐다. 이후 독일 최초의 대형 천문대인 쾨니히스베르크 건설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천문대가 완공된 이후에는 생을 마칠 때까지 천문관측의 전 분야를 연구했다. 백조자리 61번 별의 운동을 관측하여 별의 연주시차를 확인하고 그 거리를 밝혔고 해왕성의 발견에도 기여했다.

약 5만 개의 의 위치를 측정해 처음으로 태양을 제외한 다른 별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구했다.

또한 측지학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오늘날 독일에 있는 베스트팔렌에서 가난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 수출입 회사에 입사해 견습기간 동안 여행을 꿈꾸면서 언어, 지리, 다른 민족의 풍습, 항해원리 등을 공부했다. 이것이 그가 천문학과 수학을 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밤에 공부를 하면서, 1607년의 핼리 혜성 관측자료를 이용해 1804년에 그 궤도를 계산한 논문을 썼다.

이것을 올베르스에게 보냈으며, 올베르스는 감명을 받아 이 논문을 〈월간통신 Monatliche Correspondenz〉(1804)에 실리게 했고 베셀에게 일찍이 달 관측자로 유명한 J.H. 슈뢰터의 릴리엔탈 천문대 조교자리를 제안했다. 회사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해 남아 있기를 원했으므로, 회사에 남아 비교적 풍족하게 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회사를 떠나 별을 연구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느냐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릴리엔탈에서 근무한 지 4년 만에 프로이센 정부는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 독일 최초의 대형 천문대 건설에 대한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 1810년 쾨니히스베르크의 천문학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13년 이 천문대가 완공된 날부터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대장으로 있으면서 천문관측의 전분야를 꾸준히 재구성했다.

측지학에서 그는 한 번 진동하는 데 정확히 1초가 걸리도록 초진자(秒振子)의 길이를 계산·보정했다(1826). 1831~32년에는 동(東)프로이센의 자오선(子午線)을 측지·측량했으며, 1841년에는 지구의 모양이 완전한 구에서 얼마나 벗어난 타원체인가를 표시하는 지구 편평도가 1/299이라는 것을 유도했다. 또 태양의 겉보기 반지름을 측정하는 기구인 태양의(太陽儀)를 처음으로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개인방정식'에 대한 보정된 관측결과들을 도입했는데, 개인방정식이란 믿을 만한 관측결과를 얻기 위해 제거해야 되는 각각의 관측자가 가지는 통계적인 편중이다. 또한 계기오차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보정된 관측결과들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 정확했으며, 이 방법은 그 분야에서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찍부터 자신의 잠재성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처음에 종사했던 분야와 전혀 다른 직업에서 이것을 실현했다. 수많은 혜성궤도의 계산과 소행성의 발견에 큰 역할을 한 독일의 천문학자 빌헬름 올베르스(1758~1840)는 나중에 "내가 천문학에 끼친 가장 큰 일은 베셀의 천재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베셀은 망원경의 결함과 대기의 교란으로 생기는 여러 가지 측정오차를 보정해 가장 가까운 별의 위치와 운동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우주의 실제구조를 먼저 확립했기 때문에 후기의 업적들이 가능했다. 그는 수천 개의 별에 대한 정밀한 위치를 구했기 때문에 그 별들 서로간의 매우 작지만 중요한 운동을 관측할 수 있었다. 육안으로는 겨우 보이고 천구면에서 비교적 속도가 빠르다고 알려진 백조자리 61을 택해 보정을 한 뒤, 이 별이 매년 타원궤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이렇게 앞뒤로 오가는 운동인 시차 운동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계산상으로 지구에서 백조자리 61까지의 거리는 10.3광년이다.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센타우루스 알파별은 4.3광년 떨어져 있다. 이와 같은 결론을 80회 생일선물로 받은 올베르스는 베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 "우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처음으로 굳건한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라고 했다. 베셀은 이 업적으로 런던 왕립천문학회 등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베셀의 주요발견은 밝은 별인 시리우스프로키온의 미세운동으로, 이것은 보이지 않는 동반성이 그 별들의 운동을 교란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해야만 설명될 수 있었다.

이들 동반성은 오늘날 시리우스 B별과 프로키온 B별로 불리는데, 베셀이 죽고난 뒤 고성능 망원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해왕성의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4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예전부터 관측해왔던 천왕성의 궤도가 매우 작은 불규칙성을 가진 것을 주목하고서 이 불규칙성은 궤도 바깥에 알려지지 않은 행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많은 주요논문과 350편 이상의 소논문을 썼고, 여러 권으로 된 연재물인 〈쾨니히스베르크 천문대의 천문관측 Astronomische Beobachtungen auf der K. Sternwarte zu Königsberg〉(1815~44)을 발간했다.

베셀에 대한 평가

우주의 척도와 별·은하·은하단의 크기를 이전의 어떤 방법보다도 더 정밀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기초를 확립한 과학자였다. 또한 천체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위치천문학, 그들의 운동을 다루는 천체역학, 지구의 크기와 모양에 대한 연구인 측지학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또한 베셀 함수라고 알려진 함수를 도입·연구해 순수수학의 영역을 넓혔다. 1817년 상호중력장에서 운동하는 3체운동을 푸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이 함수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7년 뒤 행성섭동을 다루기 위해 더욱 완전하게 발전시켰다. 태양계와 지구에 관련된 거리를 단위로 우주의 크기를 최종적으로 확립한 공적은 베셀에게 돌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거리단위는 지구와 지구에 가장 가까운 별들 사이의 정확한 거리측정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