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운동

민족해방운동

다른 표기 언어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 民族解放運動

요약 구미(歐美)와 일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하에 있던 식민지·반식민지 제민족들이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개한 모든 저항운동의 범칭.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 국가들은 18~19세기 이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19세기말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돌입하자, 영국·미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들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고 식민지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이들 지역의 기본적 모순은 제국주의와 피억압민족과의 대립이었으며 식민지상태로부터의 해방이 당면과제였다. 19세기말부터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쟁탈·세계분할에 대하여 식민지·반식민지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점차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민족해방의 문제는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동시에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해방의 정치적·경제적 내용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체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아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 단계를 긋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식민지의 경제적·군사적 희생을 전제로 진행되었으나, 전후 식민지의 민족들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었다.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민족자결·평화의 원칙은 전승국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반식민지 제국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독립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에 의해 민족병합을 합리화하는 자치권사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베르사유 조약에서도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문제 해결에는 매우 소홀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반식민지 지역의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민족독립을 위한 하나의 이론적 기반으로도 작용했다.

한편 1917년 11월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등장하자, 민중의 힘에 대한 자각과 함께 아시아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민족혁명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아시아, 중근동의 식민지·반식민지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한국의 3·1운동(1919), 중국의 5·4운동(1919), 인도의 사티아그라하 운동(1919), 이집트의 국민당반란(1920), 터키의 국민혁명(1921) 등이 그 대표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세계체제의 성립으로 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것은 종래 부르주아 민족주의운동과는 달리,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와 농민 계급의 지도하에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동시에 지향한다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919년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의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세계혁명의 한 구성요소로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 부각되었다. 코민테른이 식민지 문제를 중시하자 많은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 여기에 공명했다.

이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운동으로 분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민족해방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구성부분으로서, 주로 민족 부르주아지의 주도권하에 있었다. 인도의 세포이 반란,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신해혁명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하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미약하나마 발전하자, 토착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민족 부르주아지들은 자유로운 자본발전을 저해하는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유럽의 근대 민주주의·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전개해갔다.

인도의 국민의회파, 인도네시아의 국민당, 필리핀의 내셔널리스트당, 이집트의 국민당 등은 1920~30년대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민족운동이었다. 중국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영향하에 있었다. 한편 식민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코민테른에서는 1927년 브뤼셀에서 '반제국주의 민족독립지지'대회를 개최하여, 서유럽에서의 혁명세력과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과의 결합을 도모하고 피압박민족 상호간의 연대를 강화했다.

식민지·반식민지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일부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의 혁명화를 도모하는 한편, 노동자·농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토지개혁 등 급진적인 강령을 표방했다.

1929년 시작된 세계공황으로 인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식민지 민중에게 공황의 모순을 전가시켰으며, 금융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국가통제·블럭화로 나아감에 따라 식민지 민중과 제국주의와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미 1935년 코민테른에서는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파시즘의 등장에 대하여 인민전선전술을 채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은 반제국주의·반파시즘의 기치하에 모든 민주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무력항쟁으로 발전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광범위한 항일구국통일전선이 결성되었고, 항일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자,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도 반파시즘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저항운동은 반파쇼·반제적인 모든 정파와 노동자·농민·대중·학생·청년 등을 결집한 반파쇼 민족통일전선과 무력(중국의 항일구국통일전선, 베트남의 월남독립동맹, 필리핀의 항일인민의용군, 미얀마의 반파쇼 인민해방전선 등)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중동·아프리카 등지에서도 독일·이탈리아 제국주의에 대하여 동일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전복하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실현할 구체적 조건이 마련되어갔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에 점령된 동유럽 여러 국가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독점 부르주아지와 대지주들이 독일군에 협력하면서 자국민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들 지역의 민주주의 세력은 타협하지 않은 민족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했으며, 독일의 패퇴와 더불어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독일·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구제국주의 지배체제의 약화는 아시아뿐 아니라 중근동·아프리카 여러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에서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여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이 대거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는데 중국·인도네시아·알제리 등과 같이 무장투쟁에 의해 이루어진 곳과 인도, 스리랑카, 다수의 라틴아메리카 제국과 같이 비무장투쟁에 의해 이루어진 곳도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인 '인티파다'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민족해방운동의 모색

한일합병으로 국내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어렵게 되자 민족해방운동가들은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연해주에서는 이범윤(李範允)이 중심이 된 권업회(1912)와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가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정부(1914)가 만들어졌고, 간도에서는 의병장 출신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경학사·신흥강습소 등 반일 민족단체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미주지역에서도 안창호(安昌浩)와 박용만(朴容萬)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인국민회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규합하려 했다.

3·1운동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인을 미개민족시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쫓는 등 갖은 수탈을 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 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운동은 시작되었다. 한번 불붙은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시베리아·연해주·미주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학살·살인·방화·고문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

1920년대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해외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은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해방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임시정부의 주요노선은 열강에 독립을 청원하여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외교론이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활동에 소득이 없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 모였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하나 둘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혜산 일대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1920. 6). 또 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각 부대들은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1921년 6월 자유시사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국내 노동자·농민의 대중운동

3·1운동을 거치면서 크게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에 의해 노농운동이 급격히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공장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농민의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1개월 동안 전개했던 부산 조선방직 파업투쟁 등이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이러한 노농투쟁은 점차 폭력화되어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의 장풍탄광 노동자 300여 명은 노동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에 맞서 탄광 시설과 사택을 부수고, 총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게 도끼·망치·곤봉으로 맞서 육박전을 벌였다.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의 2,000여 명 농민들이 일제의 산림정책을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습격했다가 여러 명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자·농민들의 대중투쟁은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한 싸움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구조를 반대하는 항일의 성격을 띤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었다.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

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국내에 널리 퍼져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가 대거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농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공산당 건설에 힘을 기울여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으며, 1924년 4월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결성함으로써 사회주의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세력으로 나뉘게 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했다. 신간회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 지회가 잇달아 결성되었는데, 1928년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갖가지 대중운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특히 1929년 11월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로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일제는 민중대회 사건을 빌미로 삼아 신간회의 핵심 간부 40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부터 신간회의 활동은 움츠러들었고, 1931년 5월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해소되었다.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운동

1930년대에 들면서 혁명적노동조합·농민조합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조직을 결성하고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파업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공장신문·팜플렛·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을 선동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공업 시설이 집중된 흥남·함흥·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전국에 걸쳐 1,759명이나 되었다.

농민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의 기존 청년동맹·여성동맹·소년동맹을 혁명적 농민조합에 편입해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로 만들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농민들은 격렬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동지탈환대·규찰대·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낫·도끼·호미 등을 들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등 투쟁을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혁명적농민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고, 1931~35년에 경찰에 적발된 혁명적 농민조합 사건은 43건, 검거된 사람은 4,121명에 이르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더욱 엄혹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의 해방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하여 그해말까지 전(全)만주를 점령하자,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은 즉각 무장을 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먼저 양세봉(梁世鳳)·이청천(李靑天)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끌었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일제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차츰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에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던 동만주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유격대를 결성하고 반일 투쟁에 나섰다.

중국 관내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김학무(金學武) 등 130여 명이 중국의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심리전, 적후방에서 벌이는 첩보활동에 종사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1941년 봄에 황허 강[黃河]을 건너 조선인이 많이 사는 화베이[華北]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에 쫓겨 자싱·항저우·창사 등지로 전전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했는데, 그해 9월 간부 12명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1942년 화베이로 가지 않은 조선의용대의 잔류부대를 흡수하여 대열을 늘리는 한편, 1943년 8월 광복군 8명을 미얀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을 도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