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로

바울로

다른 표기 언어 The Apostle Paul
요약 테이블
출생 AD. 10(?), 실리시아의 타르수스 지방(지금의 터키)
사망 67(?), 이탈리아 로마

요약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예수가 죽은 지 불과 몇 년 뒤에 회심한 그는 새로운 종교운동, 즉 그리스도교를 지도하는 사도(선교사)가 되었으며, 그 운동이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세계 종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서신들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울로의 서신들은 신학적인 정교함과 목회적인 이해를 생생히 드러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사상에 대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로의 생애에 대해서는 〈신약성서〉 외에는 믿을 만한 자료가 없으며, 그 1차적인 자료는 바울로가 쓴 서신들이다. 그 가운데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Ⅰ·Ⅱ)·〈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울로 자신이 직접 쓴 서신들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목차

접기
  1. 초기생애
  2. 개종
  3. 안티오키아의 바울로
  4. 제1차 선교여행
  5. 제2차 선교여행
  6. 제3차 선교여행
  7. 체포와 구금
  8. 업적과 영향
바울로
바울로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예수가 죽은 지 불과 몇 년 뒤에 회심한 그는 새로운 종교운동, 즉 그리스도교를 지도하는 사도(선교사)가 되었으며, 그 운동이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세계 종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서신들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울로의 서신들은 신학적인 정교함과 목회적인 이해를 생생히 드러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사상에 대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로의 생애에 대해서는 〈신약성서〉 외에는 믿을 만한 자료가 없으며, 그 1차적인 자료는 바울로가 쓴 서신들이다. 그 가운데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Ⅰ·Ⅱ)·〈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울로 자신이 직접 쓴 서신들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또 많은 학자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등도 바울로의 서신으로 간주한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성서 학자들은 사목서간인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Ⅰ·Ⅱ)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로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씌어졌다고 한다. 바울로의 개종과 선교 활동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울로 사후 몇 년 뒤에 씌어진 것 같다. 2번의 해상여행을 취급한 〈사도행전〉의 해당부분은 바울로의 동료가 쓴 일기에서 따온 것 같다. 전통적으로 이 동료는 복음서 저자요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이 견해는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

초기생애

바울로는 10년경 타르수스(다르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타르수스는 동·서간의 주요 교역로에 위치한 실리시아(킬리키아) 지방의 한 도시였으며,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고향이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로마 시민권을 상속받았다.

이 로마 시민권은 1세기 전에 로마의 용병으로 복무한 사람들이 그 대가로 로마인들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로가 2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는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그리스어로 말할 때는 로마식 별명인 바울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엄격한 유대교 교육을 받았지만 그리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세계 도시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후에 그는 이방인들(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수한 소명에 적합한 인물이 되었다. 한때 그는 모세법에 대한 정절과 충성을 강조한 유대교의 한 종파인 바리사이파의 열렬한 일원이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1세 밑에서 랍비로 훈련받았다고 한다. 율법과 그것의 랍비적 해석방법에 대한 바울로의 지식은 그가 남긴 서신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랍비들처럼 그는 수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 기술은 아마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같다. 바울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있기 전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이 열렬히 옹호했던 바리사이파적 유대교에 대해 그리스도교 운동이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그는 새로 창설된 교회의 박해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일어난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는 헬라주의자들(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가운데 개종한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헬라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음을 당했을 때, 그를 살해한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에게 맡겼다"(사도 7:58)고 한다. 그당시 바울로는 헬라주의자 개종자들과 분노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신명 21:23) 예수를 메시아와 천상의 주로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의 제사가 예수의 희생적 죽음으로 대체되고 율법도 평가절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율법을 짓밟는 행위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다……", 신명 27:26). 그리하여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헬라주의자 개종자들은 인척관계가 있는 이방도시로 도망쳤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예루살렘 잔류파는 유대교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본색을 감추었다.

개종

바울로(The Apostle Paul)
바울로(The Apostle Paul)

바울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흩어진 개종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환상을 보고 개종하게 되었다는 〈사도행전〉(갈라 1:15~16)의 진술을 확인하고 있다.

바울로 자신의 진술은 아쉬울 정도로 짧다. "하느님은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주셨다". 이보다 긴 진술은 〈사도행전〉에 3회 나오는데, 이 진술들은 바울로의 내적 경험의 본질로 추정되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에 한평생 헌신하도록 바울로를 변화시킨 것은 계시였음이 분명하다. 바울로의 개종을 심리학적으로 내적인 갈등의 해결책이었다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바울로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았다는 견해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7장을 오해한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7장은 자서전이 아니고 성숙한 그리스도교적 경험에 비추어본 보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개종하기 이전의 바울로라면 그곳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다른 구절을 살펴보아도 바울로의 초기생애는 이와같은 갈등과는 무관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율법의 기준으로 보아도 흠 없는 사람이었다.

바울로 자신의 진술은 예언자의 소명에 대한 〈구약성서〉의 진술과 매우 흡사하다. 바울로가 개종했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그 핵심은 영광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 환상을 보고 바울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여 주(主)로서 하늘에 올려졌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 환상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은 잘못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더이상 저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그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바울로에게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은 우주적인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처럼 세상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영구적인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 하느님이 오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자신의 소명이 온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도래를 예비하도록 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 대망(待望)에서 새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위상이다. 사도들이 최초로 행한 설교와 마찬가지로 바울로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은 예수가 지금 하느님의 심판의 대행자로서 하늘에 있다고 믿었다. 그를 믿고 그를 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그들의 구원자인 예수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바울로가 행한 설교의 기초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셨다"(갈라 2:20)고 믿었다. 그의 헌신은 오로지 이 새로운 중심을 향한 것이었다. 이전에 그는 사람들에게 율법에 대한 엄격한 바리사이파적 해석을 주입함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대비하도록 정력을 쏟았다. 그런데 하느님 자신이 예수를 통해 인류를 위해 한 일을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후 바울로는 어느 곳에서든 예수가 주님이라는 신앙을 선포하고자 했다.

개종 직후 바울로는 아라비아에서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으며 다음에는 다마스쿠스에 거주했다. 아마도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했을 것이다. 예전의 바울로는 그들에게 해를 입히고자 했지만 지금은 그들로부터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리스도교적 친교의 경험을 나누었을 것이다. 다마스쿠스는 바울로의 첫번째 선교 활동지였으나 이 지역에서 벌인 바울로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안티오키아의 바울로

바울로가 다마스쿠스에 간 지 3년 만에 그의 활동은 돌연 중단되었다.

바울로는 아라비아 나바테아족의 족장(통치자)과 충돌했다. 족장은 다마스쿠스의 모든 성문에 파수를 세웠으나, 바울로는 광주리 속에 숨어 성벽을 넘어 피신한 후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도 베드로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만났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만남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임에서 바울로는 예루살렘 교회 창건자들과 나란히 사도로 공인받았기 때문이다.

방문기간은 짧았고 바울로는 인근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방문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울로가 바리사이파의 보복을 당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는 바울로를 배교자로 낙인찍었다. 2주일 만에 바울로는 실리시아와 시리아로 새로운 선교를 하기 위해 떠났다. 이 선교활동의 기지는 그의 고향 타르수스였지만 이 선교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없다. 그후 바울로는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로 가서 바르나바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도왔다. 개종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방인들로서 이로 인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 위기에서 바울로는 이방인들의 옹호자로 등장했고 수년간 계속된 논쟁은 바울로에게 큰 자극을 주었으며, 이 논쟁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방인을 옹호한 그의 입장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논쟁의 초점은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교인들의 관계였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밀접하게 결합된 친교체였으며, 그 중심은 공동식사와 성만찬(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기리는 감사의 식사)이었다.

그런데 유대교 정결 규정에 매인 유대인들은 율법을 위반할까 두려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꺼려했다. 예수는 마음의 순결이 율법 준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이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이 율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방인들이 증가하자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섞이게 되었으며,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은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위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불평을 터뜨렸다.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교의 반감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선교활동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율법에 적합하다는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인들의 자유주의적 태도에 대한 소문은 그들에게 극히 해로운 일일 수밖에 없었으며, 바리사이파 출신의 개종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와 율법 준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바울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14년 동안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가 내건 목표는 이방인들의 교인 자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사도행전〉의 기록과 배치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47~49년의 대기근 때 의연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도행전〉은 이방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울로가 또 1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전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다양한 자료에 근거하여 〈사도행전〉을 기록한 루가는 실제로 1번 이루어진 방문을 2번 이루어졌다고 기록했거나, 이전에 의연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의 명단에 실수로 바울로의 이름을 포함시킨 것이다.

안티오키아는 줄곧 바울로의 선구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기지였다.

〈사도행전〉은 3차에 걸친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여행은 일반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선교여행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예루살렘 방문은 아마도 제1차 선교여행이 끝나갈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제1차 선교여행

〈사도행전〉은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바르나바의 조카인 요한 마르코를 대동하고 키프로스로 여행을 떠나 살라미스와 파포스(바포)를 방문한 내력을 묘사하고 있다.

그후 그들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로 건너가 페르가(베르게, 지금의 무르타나)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마르코는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피시디아(비시디아)와 팜필리아(밤필리아)에서 활동을 벌였다. 피시디아와 팜필리아는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지금의 얄바치 근처)에서 시작되는 로마의 속주 갈라디아의 남부지방이다.

〈사도행전〉은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로가 행한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이 설교는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유대인 청중에게 신앙을 증거한 하나의 표본이다. 이코니움(이고니온, 지금의 코니아), 리스트라(지금의 하툰사랴 근처), 데르베에 머문 뒤 그들은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페르가까지 갔고, 그곳에서 아탈리아(지금의 안탈랴) 항으로 내려가 안티오키아로 가는 배를 탔다.

새로운 개종자들 가운데 몇 명이 유대교 지역공동체 출신이고 몇 명이 이방인이었는가는 〈사도행전〉의 기록으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의 유일신론과 엄격한 도덕성에 이끌려 유대인 회당에 참여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교 선교에 수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된 특별한 이유는 바울로가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위해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전적으로 이방인으로만 새로운 회중이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당시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는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안티오키아에 파견된 사람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때문이었다. 바울로는 자신과 바르나바가 '계시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증언한다. 아마도 이 말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루살렘의 소환에 따라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니고 한 예언자의 메시지에 공감한 나머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는 디도가 끼여 있었다. 이미 바울로는 이 이방인을 자신의 선교 팀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의 기록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의 내용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선의 방법은 이 둘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이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다음의 3가지 주요조치가 취해졌던 것 같다. 첫째,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야고보·베드로·요한과 사적인 면담을 가졌다(예루살렘 공의회). 이 면담에서는 선교를 하면서 설교한 내용들을 서로 비교했으며, 그 내용이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방인 개종자들의 할례가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바울로의 주장이 승인되었다는 뜻이다.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은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둘째, 대규모의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그것은 이방인 선교에 관해 모든 것을 알려줌으로써 성령의 능력이 이방인 선교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결과 개종자들을 유대화하기 위해 더이상의 압력을 가하지 않고 이방인 선교를 계속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바울로는 안티오키아로부터 이방인 선교를 계속 수행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기지로 삼아 유대인들에게 계속 선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예루살렘 교회가 확고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알리는 서신이 안티오키아로 발송되었다.

이교의 희생제의에서 사용된 고기를 삼갈 것, 유대교 관습에 따라 정결한 고기만을 사용할 것, 성 관계에 대한 유대교의 규례들을 준수할 것 등이 그것이다. 나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종합해보면 이 서신의 내용은 바울로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서신은 바울로가 안티오키아를 떠난 직후 유대와 시리아의 수많은 유대계 그리스도인 회중과 바울로의 관계를 규제하려는 추후적인 시도의 일부였다고 추정된다.

바울로의 견해는 베드로의 지지를 받았다.

곧이어 베드로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했다. 확실히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섞인 회중의 삶을 함께 나누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몇 사람의 강경파가 안티오키아에 오자 그는 이방인 교인들과 식사를 나누는 일을 삼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나바를 포함한 다른 유대인 교인들도 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런 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부친 서신이 이미 바울로에게 보내졌다면 이런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위기는 이미 합의한 내용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음이 틀림없다. 바울로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인물들도 정결 규정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는 회중의 친교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디도를 둘러싼 분란으로부터, 강경파가 회중을 두 집단으로 나눌 것을 요구하고 회중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이방인 개종자들의 유대화를 필요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바울로는 합의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고집했고 방문자들은 안티오키아를 떠나버렸다.

제2차 선교여행

바울로는 남부 갈라티아(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재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가려 했지만, 바울로는 그가 첫번째 여행에서 실패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를 거절했다. 바르나바와 마르코는 키프로스로 갔다. 〈사도행전〉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나머지 기록들은 오로지 바울로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인 실라(로마식 이름은 실바누스)를 대동했다. 그들은 소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갈라디아로 갔다. 리스트라에서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자신의 팀에 맞아들였다.

디모테오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은 개연성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선교활동이 주로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로는 영향력있는 중심지역에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때문에 그는 아시아 속주의 수도이자 에게 해안의 항구도시인 에페소스로 갔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성령에 의해'(아마도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예언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표현일 것임) 방해를 받았다. 그는 북부 비티니아 지방의 큰 도시로 관심을 돌렸다. 북부 갈라디아의 이방인 교회들은 그 사이에 이미 창설되어 있었던 것 같다(〈갈리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들 교회에 보낸 것). 그의 계획은 다시 한번 좌절된 셈이다. 그래서 그는 북서쪽에 있는 트로아스로 갔다.

그곳에서 방문을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뱃길로 마케도니아로 갔다. 그는 필립피(필립비), 데살로니카(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 베레아에 교회를 설립했다. 필립비는 그리스를 관통하는 주요도로였던 비아 에냐티아에 있는 로마 식민지였다. 이곳에서 바울로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방인 개종자들의 무리를 얻었고, 그들은 바울로에게 기부금을 바쳤다.

〈사도행전〉은 바울로와 실라가 필립비에서 감옥에 갇혔으나 로마 시민권을 제시하여 풀려났다고 전한다.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는 바울로에게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광장에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후 코린트(고린토)로 갔으며,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아레오파고 연설은 철학적으로 훈련받은 청중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바울로는 단 하나의 교회도 설립하지 못했다.

그당시 일어난 사건들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이 최초로 씌어진 바울로의 서신일 것이다. 이 서신은 실라와 디모테오가 코린트에서 바울로와 합류한 직후에 씌어졌다. 바울로는 데살로니카를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서신에서 그는 이곳에 새로 세워진 교회가 그리스도를 황제의 경쟁자로 선포해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데 대해 우려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서신으로부터 우리는 바울로가 이방인 청중에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도록" 가르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도록"(Ⅰ 데살 1:9~10)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울로가 선교를 위해 행한 설교의 훌륭한 실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바울로에게 개종자들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우려한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에 접한 바울로는 심판을 위해 그리스도가 올(재림할) 날은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그에게 속한 사람으로 선언되고 영원한 왕국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구원받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를 보완하기 위해 그 직후에 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가 바울로에 의해 직접 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것에는 재림에 앞서 일어날 사건들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불행하게도 이 상세한 묘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실패한 직후 코린트에 도착했을 때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코린트에서 그는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라는 유대인 부부를 만났다. 바울로처럼 천막을 만들었던 이 부부는 바울로의 일평생 지기가 되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로마를 떠나 코린트에 왔다.

그때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한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이 반포된 직후였다. 그들은 이미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 같다. 거대한 교역 중심지인 코린트에서 바울로는 마침내 장기적인 교역 활동을 펼칠 수 있었으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당시 바울로가 갈리오 총독 앞에 끌려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바울로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확인하는 데 중요하다. 델포이에서 발굴된 한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AD 51년에 공직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바울로는 AD 50년에 코린트에 도착했던 것 같다. 바울로가 코린트를 떠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가 에페소스까지 그와 동행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 뱃길로 카이사리아(지금의 카이세리)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안티오키아로 갔다.

제3차 선교여행

바울로는 이미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교회를 설립한 상태였다.

그 중심은 코린트였고, 이미 코린트만큼 중요한 에페소스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내부강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그는 육로를 거쳐 에페소스로 갔다. 에페소스는 그후 3년 동안 바울로의 활동기지가 되었다. 〈사도행전〉은 별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이 기간 동안 콜로사이(골로사이), 히에라폴리스, 리쿠스 골짜기의 라오디케아(라오디게이아)에 교회를 설립했음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은 에페소스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 집단이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아마도 그곳에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로는 자신의 서신에서 에페소스에서 야생동물들과 싸웠고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커다란 재난에 직면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바울로는 가장 중요한 서신들을 집필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로가 매우 중대한 난제에 봉착했음을 시사한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울로는 이 서신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비도덕적인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한 편지를 이미 보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울로는 광범위한 문제와 대결하고 있다. 서로 경쟁하는 집단들은 서로 다른 교사들(베드로, 아폴로, 바울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근친상간이 횡행하는데도 아무런 비난도 가해지지 않았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바울로의 가르침은 음란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결혼과 이혼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방계 그리스도교도들이 먹어도 좋은 음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양심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성만찬(주의 만찬)에서 정도를 벗어난 행동이 버젓이 행해졌다. 이 문제들을 다루면서 바울로는 자신이 결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성만찬 양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성령의 선물들을 설명하는 부분에는 유명한 사랑의 장(Ⅰ 고린 13)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로는 성령의 선물을 설명하면서 방언으로 말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 부활에 관한 긴 장(Ⅰ 고린 15)을 보면, 그리스도교도의 삶이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 이미 참여한 삶임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재림이 임박했고, 영원한 생명은 이 사건 이후에 완전히 경험되리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린트 교회에서는 새로운 분란들이 일어났다. 다른 교회로부터 침투해 들어온 사람들이 바울로의 권위를 훼손시키고자 했다.

그는 코린트로 달려갔으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에페소스로 돌아와 신랄한 편지를 썼다. 아마도 이 편지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0~13장에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디도가 이 편지를 들고 에페소스를 떠난 직후 편지 쓴 것을 후회했다.

바울로는 트로아스에서 선교활동을 벌일 생각이었지만, 코린트 교회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귀환길의 디도를 만날 희망을 품고 마케도니아로 갔다. 디도는 바울로의 신랄한 편지가 소정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크게 안도한 바울로는 화해라는 주제로 가득 차 있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1~9장으로 추정)를 썼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Ⅱ 고린 5:19). 또한 바울로는 인간이 새로워져 영광의 상태로 변화된다는 견지에서 부활을 다시 한번 가르치고 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또 하나의 주제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의연금이다.

이 선물을 통해 바울로는 유대계 교회와 이방계 교회들의 일치를 상징하고자 했다. 이 계획의 배후에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화하고 당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면화된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갈라디아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시도를 다루고 있다.

이 서신에서 바울로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자신의 교리(信仰義認論)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바울로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리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전적으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바울로는 마케도니아에서 코린트로 갔다.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며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바울로가 이 편지를 집필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루살렘에 의연금을 보낸 후 극서(極西:스페인을 언급할 때 쓴 표현) 지방을 복음화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이방인 개종자들의 유대화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줄 세력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하느님의 계획은 보편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신앙을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다.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 율법은 인간의 죄의 본성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사람들을 의롭게 만드는 데는 무력하다. 바울로의 적들은 만일 율법이 없다면 이방인 개종자들은 코린트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방종한 행동을 하기 쉬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같은 우려에 대해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성령의 성화(聖化) 능력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고 응답했다. 그다음 바울로의 적들은 바울로의 주장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에 대해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에 따르지 않았지만 이방인 선교의 성공을 통해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의 구원을 찾도록 자극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온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될 것"(로마 11:26)이다.

그후 우주는 자신의 목표를 완수하게 될 것이며, 최후의 변모가 시작될 것이다.

체포와 구금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 바울로는 자신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화를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냈고, 심지어는 예루살렘 교회가 의연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이 2가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던 것 같다. 〈사도행전〉은 이방인 교회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이 바울로의 예루살렘 여행에 동행했다고 전하지만 의연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의연금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없었음을 루가가 전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가정할 때 가장 잘 설명된다.

만일 그렇다면, 의연금의 전달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상징하려는 바울로의 희망은 좌절된 셈이다. 예루살렘에서 바울로는 이방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에 있는 성전의 안뜰로 이방인 교회의 파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거짓 고소를 당해 체포된다.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지만 이때문에 바울로는 폭도들로부터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 덕분에 좋은 대접을 받았다. 바울로의 생명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꾸며졌을 때, 그는 로마 군대의 사령부가 있던 카이사리아로 압송되었다.

총독 펠릭스는 유대교 당국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바울로를 감옥에 가두었다. 2년 후 펠릭스의 후임자인 페스투스(페스도)는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바울로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바울로는 예루살렘행을 거부하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다.

로마를 향한 여행은 늦가을에 시작되었으나 도중에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여행자들은 몰타에서 3개월 동안 발이 묶였다. 그들은 AD 60년 봄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울로는 재판을 기다리며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이 대목에서 끝난다.

바울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져 있는 셈이다. 사목서간들이 바울로의 진짜 서신으로 인정되었을 때만 해도 사목서간들의 증언에 따라 바울로가 무죄방면되어 그리스와 소아시아, 심지어 크레타에서 계속 활동을 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활동은 바울로가 2번째로 체포되어 로마로 돌아가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가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목서간들은 바울로의 이름을 도용한 서신들로 간주되고 있으므로 바울로가 무죄방면되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바울로는 감옥에 있는 동안 몇 편의 서신을 집필했다.

이 서신들은 옛날 바울로가 에페소스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일 수도 있고, 카이사리아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 씌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옥중서신들 가운데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일반적으로 바울로가 직접 쓴 서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로의 진짜 서신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골로사이의 한 그리스도교도인 필레몬으로부터 도망친 노예에 관한 것이다. 바울로는 감옥에서 그를 개종시켜 필레몬에게 되돌려보냈다. 그는 "이제부터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교우로서"(필레 1:16) 필레몬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미묘한 상황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이 서신은 바울로의 서신들 가운데 주옥과도 같은 작품이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필립비 그리스도인들의 관대성을 담담하게 인정해주고 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골로사이에서 거짓 교사들이 일으킨 분란들을 다루고 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유대교에서 벗어난 비정통적인 종파로 추측된다. 이에 대응해 바울로는 하느님의 온전한 구원 계획을 구현한 하느님의 참된 지혜로서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방인들의 특권을 웅변조로, 어쩌면 지나치게 수사학적으로 진술한다.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지위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들었다"(에페 2:14)는 것이다.

업적과 영향

바울로의 영원한 금자탑은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회이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화하려는 파벌에 맞선 그의 단호한 태도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내부의 소종파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한 것은 그 누구보다도 바울로의 덕분이라는 주장은 옳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은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디모테오와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들은 바울로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집필되었다(→ 디도에게 보낸 편지). 이 서신들은 1세기말경에 씌어진 것 같다. 이와 동시에 현존하는 바울로의 서신들이 수집되었다. 그것은 교회 전체에 그 서신들을 회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서신들은 곧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준거가 되었다. 특히 속죄(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가르침)에 관한 이론들은 언제나 바울로의 사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절반을 이루는 서방(라틴) 진영에서 바울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저작들을 통해 교회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펠라기우스 논쟁은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문구에 대한 해석에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논증한 아우구스티노는 바울로의 예정사상에 논증의 근거를 두었다. 그는 바울로의 예정사상이 우주적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예정된 계획을 언급한 것이며 자유의지의 행사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해석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도 바울로에게 큰 빚을 졌다. 마르틴 루터는 의인론에 몰두했다. 그는 신앙과 공로를 구별했으며 이를 거점으로 중세 후기 교회를 공격했다. 장 칼뱅은 바울로로부터 교회를 선민들의 공동체로 보는 개념을 끌어냈고 예정사상을 활용했다. 그는 이에 약간의 추론을 덧붙였는데, 신자들만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로의 가르침은 아우구스티노의 영향력을 통해 종교개혁과 그 유산인 근대 개신교의 루터파 교회와 칼뱅파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동방정교회에서는 서방교회만큼 중시된 적이 없다.

바울로에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연구는 이같은 논쟁들을 넘어서서 바울로를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연관시켜 살펴보려고 한다. 현대 신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바울로 사상의 기초는 그당시의 유대교 개념들과 연관시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칼뱅의 일부 후계자들이 표방했던 비타협적인 예정론은 바울로의 의도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된 해석으로 간주되었다. 바울로의 사상이 그리스 사상과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거부되고 있다.

오늘날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으로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형편이다. 회심 경험을 통해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 있는 우주적인 주(主)이며, 하느님 나라의 대행자요 인도자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