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다른 표기 언어 Los Angeles 동의어 LA
요약 테이블
위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 남부
인구 4,085,014명 (2020년 추계)
면적 1,302㎢
언어 영어
대륙 북아메리카
국가 미국

요약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부의 주요도시. 뉴욕 시에 이어 미국에서 2번째로 인구가 많은 시이며 대도시권이다.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타다 만 종이조각과 비슷하다. 해안선을 따라 북쪽과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완충작용을 하기 때문에 여름의 무더위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없다. 시가 건립된 초기에 백인이 소수 인종집단이었으며, 1981년 건립 200주년을 맞았을 때도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 중간기에 조금 증가했을 뿐 다시 크게 감소했다.

목차

펼치기
  1. 로스앤젤레스 시의 구조
  2. 기후
  3. 자연현상
    1. 스모그
    2. 지진
    3. 바람
    4. 화재
  4. 주민
    1. 개요
    2. 흑인
    3. 멕시코계 미국인
    4. 아시아인과 태평양제도인
  5. 경제
    1. 개요
    2. 농업
    3. 공업
    4. 영화
    5. 교통
    6. 통신매체
  6. 정치와 사회
    1. 행정
    2. 교육
  7. 오락과 문화
    1. 공원
    2. 스포츠
    3. 역사적 건축물
    4. 예술
  8. 역사
    1. 대도시권의 성장
    2. 현대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에 이어 미국에서 2번째로 인구가 많은 시이며 대도시권이다. 아열대기후, 야자나무, 수영장, 텔레비전 방송국, 항공우주산업체 등으로 대표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하고 동쪽으로는 샌게이브리얼 산맥과 접하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정교하게 건설된 고속도로망이 눈에 띄는 특징이다. 특별히 기동력이 필요한 이 지역에서 자동차는 생활의 필수품이다.

시는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인데, 군은 베벌리힐스·패서디나·롱비치 등 80개 이상의 시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샌타캐털리나와 샌클러멘티 2개 섬이 해협에 떠 있다. 올드볼디로 알려진 샌안토니오 산이 있는데, 정상의 높이는 3,062m이다. 군에는 2,330㎢의 사막과 120km에 걸쳐 뻗어 있는 해안이 있다. 도시는 대도시권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지도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시의 구조

로스엔젤레스(Los Anqeles)
로스엔젤레스(Los Anqeles)

로스앤젤레스 시는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타다 만 종이조각과 비슷하다.

시의 경계 내에는 자치체로 인가받지 않은 군 소유지뿐만 아니라 베벌리힐스나 컬버시티 같은 독립 자치시들이 흩어져 있다. 평균고도는 84m인데, 시스터엘시 봉이라고도 하고 1,549m에 이르는 루켄스 산이 있는가 하면 해수면과 같은 높이의 지역도 있다. 샌타모니카 산맥은 236㎢의 면적을 차지하며 최고 높이는 914m이다. 이 산맥을 사이에 두고 할리우드, 베벌리힐스, 퍼시픽팰리세이즈와 샌퍼낸도 계곡의 남쪽 경계가 분리되면서 시가 2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샌퍼낸도 계곡은 샌타모니카 산맥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556㎢의 면적을 차지하며 이곳에 버뱅크, 글렌데일, 노스할리우드, 스튜디오시티, 셔먼오크스, 엔시노, 타자나, 우들랜드힐스, 샌퍼낸도 포교지역 등의 교외지역들이 있다.

샌퍼낸도 계곡(San Fernando Valley)
샌퍼낸도 계곡(San Fernando Valley)

샌퍼낸도 계곡을 동서로 가르는 주요간선도로는 벤투라 대로이다. 27km의 대로를 따라 전문 상품점, 각 민족의 민속식당, 은행, 의료 건물, 상점가, 자동차 대리점, 부동산업자들의 사무실 등이 들어서 있다. 1920년대에는 지저분한 길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경제발전의 여파로 인해 주요거리로 발전했다.

샌퍼낸도 계곡을 독립적 단위로 본다면 벤투라 대로는 전국에서 6번째로 큰 시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다.

샌퍼낸도 계곡은 한때 시의 혼잡과 인종적 대립관계를 피해온 중산층 백인 가족들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분양 맨션들과 상점가들이 들어서면서 전원 토지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호두나무 과수원들과 시장출하용 채소농장들 대신 흑인·라틴아메리카인·아시아인들의 주거지가 들어서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신흥 공장들에서 일하는데 기초산업에서 첨단기술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버뱅크는 전국 연예계의 중심지이다. 그밖에 음반회사들과 내셔널 방송국(NBC)이 있으며 월트디즈니 영화제작소, 워너브러더스영화사, 컬럼비아 영화·텔레비전 제작국 등의 영화제작소들이 있다.

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할리우드는 1887년에 금주당(禁酒黨) 당원인 호레이스 윌콕스가 건설했다. 윌콕스는 이곳을 술을 마시지 않고 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10년 식수 공급이 어려워지자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시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이듬해 선셋 대로와 가우어 가(街)의 교차점에 있는 블론도 태번이 할리우드 최초의 영화촬영소가 되었다. 60년이 지난 뒤 컬럼비아영화사가 버뱅크로 옮겨가게 되자 블론도 태번의 시대도 끝났다. 그무렵 유명 연예인들은 이미 할리우드를 떠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베벌리힐스의 언덕에 있는 한적한 대저택단지에 자리잡았다.

할리우드(Hollywood)
할리우드(Hollywood)

기후

해안선을 따라 북쪽과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완충작용을 하기 때문에 여름의 무더위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없다. 가장 더운 몇 달 동안에도 다행히 습도가 낮고 밤은 서늘하다. '아침과 저녁 한때 낮게 구름이 끼고 낮에는 맑음'이라는 표현이 가장 흔한 여름철의 기상예보이다. 시의 각 구역에 따라 뚜렷한 기후 차이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샌퍼낸도 계곡 지역은 샌타모니카 산맥의 반대쪽에 있는 지역에 비해 대개 겨울에는 몇 도쯤 더 낮고, 여름에는 조금 더 덥다. 시의 평균기온은 약 18℃이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1955년 9월 1일의 기온이 43℃로 최고를 나타냈고, 1949년 1월 4일의 기온이 -2.3℃로 가장 낮았다. 연평균강수량은 356㎜인데 대부분은 겨울철에 내린다.

자연현상

스모그

최초로 캘리포니아를 탐험했던 유럽인인 후안 카브리요는 1542년에 쓴 보고서에서 "큰 만(灣)의 대기 중에 엄청난 연무(煙霧)가 있다"고 기록했다. 그 큰 만이란 아마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항구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4세기 뒤인 1943년 9월에 상당량의 대기 오염도가 최초로 확인되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이 역전현상을 일으켜 더운 공기층이 아래에 있는 접시 모양의 분지에 서늘한 공기를 가두어두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태양은 계속 공장들과 정유소들, 특히 군내에 있는 수백 만 대의 자동차, 소형트럭, 트럭 등이 배기관을 통해 뿜어대는 해로운 증기를 가열시키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수십 억 달러의 비용을 들였으나 대기를 말끔히 정화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다만 더욱 오염이 심해지는 것을 막는 방책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스모그는 크게 줄지 않았고, 도시 대기오염관리국의 책임자는 "산업과 교통구조의 대대적인 재정비, 성장의 제한,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 없다면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지진

그레이트샌앤드레이어스 단층은 로스앤젤레스 중심가로부터 53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보다 규모가 작은 40개 이상의 단층들이 대도시권 곳곳을 교차한다. 리히터 척도의 10단계 가운데 7 이상을 나타내는 강한 지진은 1850년대 이래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지역 주민들은 경도이기는 하지만 주기적인 진동을 흔히 겪는데, 파괴적인 지진이 1925년에는 샌타바버라, 1933년에는 롱비치에서 콤턴까지, 1971년에는 샌퍼낸도 계곡에서 발생했다.

바람

때때로 샌타애나라는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시에 타격을 입힌다. 샌타애나 협곡에서 자주 부는 바람이기 때문에 그 협곡에서 이름을 따왔다. 내륙 고원에서 공기가 급히 하강할 때 바람이 발생하고 압축작용에 따라 더운 공기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샌타애나가 불어올 때면 눈에 띄게 불안해한다.

화재

초목으로 덮인 산줄기에는 언제나 화재의 위험이 있다. 기온이 높은 날에 좁은 협곡 사이로 건조한 바람이 불면 화재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1961년 11월 6일 부유한 서부 지구의 벨에어에서 발생한 화재가 가장 큰 피해를 기록했는데 이 화재로 484가구가 소실되었다.

언덕 위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화재로 민둥산이 된 협곡에 겨울 비가 내릴 때는 산사태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주민

개요

시가 건립된 초기에 백인이 소수 인종집단이었듯이, 1981년 건립 200주년을 맞았을 때도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 중간기에 조금 증가했을 뿐 다시 크게 감소했다.

198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는 스페인계 인구를 인종집단으로 보지 않고, 민족집단으로 취급했다. 이때 백인은 전체 시 인구 가운데 반 정도를 차지했고, 스페인계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계 인구는 약 1/4, 그리고 흑인들이 1/6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인들이나 태평양제도 출신 사람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소수 집단으로 나타났다.

흑인

시를 건립했던 44명의 사람들 가운데 26명이 아프리카계 후손들이었고 한때 한 흑인 재단사의 손녀가 현재의 베벌리힐스가 된 땅을 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에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은 3만 8,894명뿐이었다. 50년 뒤 주로 남부지방의 시골에서 흑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이때 흑인들의 수는 50만 명이었다. 흑인 자녀들은 주거양식에 따라 분리되어 불평등한 학교들에 배정되었는데, 이것은 사실상 인종차별 조치였다. '거주지 소재학교에 입학허가'를 보장받기 위해 오랫동안 격렬한 법정투쟁을 하였으나 1981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그결과 아이들은 같은 민족의 아이들끼리만 교류하도록 되었다. 재미있게도 바로 이 시기에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은 흑인 및 갈색 인종 부모들과 그들의 자녀 22명에 의해 세워진 로스앤젤레스 시 건립 200주년을 축하하고 있었다. 시의 중남부에는 흑인 빈민가가 있는데 와츠는 그 중심부로서 6.5㎢의 면적을 차지한다. 1965년 8월 11일 뜨거운 여름 밤에 폭발이 일어났었다.

백인들에게 차콜 골목의 불꽃은 도시 빈민가에 갇힌 시골 출신 흑인들의 비참함과 분노의 빛으로 보였다. 6일 동안 약탈과 화재 등이 계속된 뒤에 34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1,032명이 부상당했으며 3,952명이 체포되었다. 15년 뒤에야 와츠에 사는 흑인들은 일자리와 주택문제에 있어서 멕시코계 미국인들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멕시코계 미국인

자칭 치카노스라고 하는 어린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폭력배들이 판치는 바리오스('구역'이라는 뜻)에서 성장한다.

그 지역에는 일자리가 없고 주거지는 형편없으며 학교는 붐비고 거리는 약물중독자들로 차 있고 복지후생도 기준 미달이다. 빈민가를 떠도는 점에서는 흑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흑인들과는 달리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건설한 땅에서 살면서도 영어 아닌 이방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또다른 약점을 갖는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스페인어를 쓰는 인구 가운데 약 반 정도가 로스앤젤레스 군에 산다.

로스앤젤레스에는 규모로만 따진다면 멕시코 시 다음으로 큰 멕시코인들의 대도시권이 있다. 그리고 바리오스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아시아인과 태평양제도인

1970년대말 "우리는 1개의 파이를 놓고, 흑인들 및 치카노스와 함께 싸운다"라고 한 중국계 미국인 사회사업가가 지적한 바 있다.

그당시 시에서 급속히 성장하는 세력이었던 아시아인과 태평양제도인들은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에서 온 난민들의 정착을 돕고 있었다. 시청에서 몇 구획 떨어진 리틀도쿄는 1900년대초 이래 미국 본토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밀집된 중심지가 되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약 4만 명의 일본계 남부 캘리포니아인들이 임시 포로수용소에 격리수용되었다. 이들이 석방된 뒤 20년 동안 리틀도쿄는 쇠퇴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곳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대부분 일본이 지원한 자본으로 재개발되었다. 한편 시의 중심가에서 동쪽의 버몬트 가(街), 북쪽의 베벌리가, 서쪽의 웨스턴가를 연결하는 직4각형 지역은 미국 내 최대의 한국인 밀집지역이다. 짧은 이민역사에도 불구하고 약 30만 명의 한국인들이 160여 업종, 9, 000여 개 이상의 업소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특유의 근면성으로 기반을 굳히고, 세력을 확장해왔다. 최근에는 글렌데일·샌퍼낸도밸리까지 주거지역이 확산되었고 정치적인 지위도 높아가고 있다. 매년 9월에 '한국의 날' 행사가 벌어진다.

경제

개요

한때 로스앤젤레스는 포도원, 오렌지 과수원, 낙농장 등으로 가득찬 농업중심지였으나 지금은 공업화된 도시권의 중심부가 되었다.

도시는 새로 들어선 분주한 금융가를 중심으로 반경 96km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만약 이른바 '황금원주'라고 불리는 이곳이 독립된 군이라면 그 군의 총생산은 세계에서 수위를 차지할 것이다.

농업

1910년 이래 로스앤젤레스 군은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농업지역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지역 인구가 50% 정도 증가하자 이에 따른 개발에 밀려 매일 1,200ha에 달하는 농지가 없어졌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에도 1km당 10ha의 농지가 불도저에 밀려 없어졌다. 이에 따라 가장 부유한 농업지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공업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샌프란시스코가 주에서 으뜸가는 제조업 중심지였으나 1920년대부터 로스앤젤레스가 샌프란시스코를 훨씬 앞질렀다.

주요생산품은 항공우주장비·석유·정유·가공식품·전자기기·약품·유리·고무·시멘트 등이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서반구 최초의 국제항공회의가 열렸다. 12년 뒤 도널드 W. 더글러스는 샌타모니카에 있는 그의 공장에서 1주일에 1대 꼴로 비행기를 생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미국이 사용한 군용 항공기 가운데 1/3이 로스앤젤레스지역에서 생산되었다.

1984년 올림픽 경기를 위한 준비작업들 속에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1892년 에드워드 L. 도히니가 이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를 공업용 연료로 시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이야기했던 대로 로스앤젤레스는 주요 자원인 석유 위에 주저앉아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보유량이 많았다. 1921년에 단위면적당 세계 최대량의 석유가 시그널힐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당시는 자동차 때문에 석유제품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었다. 그후 반세기 동안 이곳에 있는 2,400개의 유전에서 8억 5,900만 배럴의 석유가 생산되었다.

영화

두 세대에 걸쳐 영화팬들은 로스앤젤레스를 세계 영화계의 수도(首都)로 생각해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주요촬영소들이 이곳 소유의 귀중한 부동산들을 처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는 여전히 영화·텔레비전·라디오·음반 산업의 중심지이다. 20세기폭스영화사의 야외촬영용 부지는 센추리 시로 변했다. 이 '즉석 도시'를 건설하는 데 수백 만 달러가 들었다. 샌퍼낸도 계곡에 있는 유니버설 제작소의 영화제작 활동은 매년 이 지역을 찾는 수백 만 명의 방문객들에게 인기있는 명물이 되었다(유니버설영화사).

교통

대도시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차, 소형 트럭, 트럭 등을 이용해서 일터로 간다(도로).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대조적으로, 1900년대초에 시가 놀라운 성장을 했던 것은 도시 사이를 잇는 훌륭한 대중 수송시설 때문이었다. 그 시설이란 철도왕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헨리 E. 헌팅턴이 운영했던 크고 빨간 전차들이었다. 1940년대초에 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전차시설은 없어졌다.

통신매체

시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은 1851년에 주간지로 발행된 〈스타 Star〉였다.

30년 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Los Angeles Times〉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에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장군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인수했다. 그후 이 신문은 시의 후원자들, 보수적인 공화당원들, 노동조합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권위있는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에 오티스의 손자인 오티스 챈들러에게 경영권이 주어졌을 때, 보다 자유롭고 대중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아침식탁에서 이 신문을 읽는 일은 관례가 되었다.

1980년대에 이 신문의 주요경쟁지로 떠오른 것은 허스트사가 발행하는 석간인 〈헤럴드 이그재미너 Herald-Examiner〉가 아니라 오히려 샌퍼낸도밸리에서 새로운 형태로 펴낸 〈데일리 뉴스 Daily News〉 등 교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이었다. 이 지역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들 가운데 3곳과 텔레비전 방송국들 가운데 1곳 이 스페인어 사용 인구를 위해 방송을 한다.

일본어·중국어·한국어로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국도 있다.

정치와 사회

행정

시장과 15명의 시 의회 의원들은 4년 임기이며 선거에 의해 뽑힌다. 그밖에 시 법무관, 회계감사관, 7명으로 구성된 교육위원회 위원들도 선거에 의해 뽑힌다.

5명으로 구성된 군정(郡政) 집행위원회가 4년 임기로 군을 관할한다. 군정집행관들은 관할구역상 시와 군에 2중으로 속해 있는 기관들을 관리한다.

교육

군에는 약 20개의 전문대학들과 5개의 주립대학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2개의 고등교육기관은 1880년에 설립된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와 1887년 설립된 옥시덴탈대학이다.

USC는 특히 법과대학·의학대학·치과대학·공과대학·공연예술대학 등으로 유명하다. 주의 지원을 받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는 1919년에 설립되었고 여러 학과의 대학과정과 대학원과정을 갖추고 있다. 특히 생명과학과 지구물리학, 예술분야 등에서 상당히 두각을 나타낸다.

1891년 스루프 종합 기술전문학교로 출발했던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은 1910년 현재의 위치인 패서디나로 옮겨졌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연구진들은 미국 항공우주국 산하의 제트 추진 실험소 및 마운틴 윌슨 관측소와 공동으로 우주탐사를 진행하고 있다.

오락과 문화

공원

약 9ha에 달하는 핸콕 공원은 랜초라브리아 갱(坑)이 있는 곳에 있다(라브리아 타르 채굴장). 1916년 석유왕인 G. 앨런 핸콕이 이 공원을 군에 기증했다.

1906~13년에 거품이 이는 검은 웅덩이들을 발굴한 결과 독특한 화석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멸종한 포유동물들의 화석화된 두개골과 뼈였는데, 타르가 스며나와 범벅이 된 것이었다. 타르 웅덩이들 외에 실물 크기의 동물 모형들이 많은 것도 핸콕 공원의 특징이다. 거대한 맘모스, 아메리카산(産) 마스토돈, 검치(劍齒)호랑이, 나무늘보, 얼굴짧은곰 등의 모형이 있다.

그리피스 공원은 험난한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1,644ha인데 베벌리힐스의 면적보다 크다. 이곳에 있는 시립동물원에는 3,000가지 이상의 동물들이 있다. 공원 안의 언덕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동물원에 있는 이국적인 동물들을 바라보는 꼬리가 검은 사슴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희극 작가인 윌 로저스가 소유한 목장이 퍼시픽팰리세이즈에 있고, 무성영화 시절에 카우보이로 출연했던 배우인 윌리엄 S. 하트의 목장이 뉴홀에 있는데, 2곳 모두 공원으로 보호되어 있다. 시의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디즈니랜드, 너츠베리 농장, 머린랜드, 매직마운틴 등 상업적 오락시설들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스포츠

대학 대항 운동경기들 가운데 최고의 흥미거리는 팽팽한 경쟁 상대인 USC와 UCLA가 벌이는 시합이다.

패서디나에 있는 로즈볼 경기장에서 매년 1월 1일에 대학 선발 미식 축구의 결승전이 벌어진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여러 종목의 프로 팀들도 있다. 야구·미식축구·농구·아이스하키 종목 등의 메이저 리그 팀들이 있다. 샌타애니타 공원과 할리우드 공원에서는 승마경기를 볼 수 있다.

역사적 건축물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사람들은 스페인계 및 멕시코계 선조들이 남긴 과거의 흔적에 그다지 집착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금세기초의 활발한 편집자이자 작가였던 찰스 F. 러미스의 아낌없는 노력 덕택에 1771년 건설된 산가브리엘아르칸겔 포교지역과 1797년 세워졌던 산페르난도레이데에스파냐 포교지역이 보존되었다. 올베라가(街)에는 좁은 구획을 따라 멕시코 상점들과 카페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스페인의 아빌라 가문이 살던 아도비 벽돌저택도 이곳에 있는데 181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1930년에 이 거리가 개방된 이래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으며, 지금은 엘푸에블로데로스앤젤레스 주립역사공원의 일부가 되었다.

공원의 면적은 16ha이며, 시가 처음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던 광장도 이곳에 있다. 그리고 주민들이 지은 최초의 교회건물도 공원 안에 있다. 교회건물은 1822년에 완성되어 처음 문을 열었고, 1861~62년에 재건축되었다.

와츠 타워스로 더 잘 알려진 시몬 로디아의 세 탑들(각각 30m, 29m, 16m)은 깨진 타일과 접시조각·병조각·조개껍질 등으로 만들어졌다.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이탈리아 이주민인 로디아가 33년 이상에 걸쳐 만들었다. 그는 나중에 "나는 뭔가 값진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고, 마침내 해냈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54년 이 탑들이 완성되자 그는 한 이웃에게 소유권을 주고 영영 자취를 감췄다.

20세기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선교 양식의 건축물에 이어 나무로 겉을 장식한 캘리포니아식 방갈로가 유행했다. 1908년 찰스 그린과 헨리 그린이 패서디나에 갬블 하우스를 지었는데 이 작품이 방갈로 양식의 본보기가 되었다. 약 70㎡ 면적의 갬블 하우스는 현재 건축학이나 건축설계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연구소로 사용된다.

지금의 반스댈 공원에 있는 할리호크 하우스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지었다. 이 건물이 완성된 뒤인 1920년대초에 라이트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여러 건의 건축 주문을 받았다. R. M. 신들러가 라이트를 도와서 할리호크 하우스의 작업을 감독했으며, 신들러 자신도 나중에 좋은 작품을 제작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시에서 가장 인정받지 못했던 건축가는 어빙 길로 여겨지고 있고, 반면 리처드 뉴트라는 가장 권위있는 건축가였다. 1920년대말에 뉴트라가 건축한 철조 건축물인 러벌 하우스는 국제양식(1920~30년대 서유럽에서 일어난 반전통적 건축양식)의 대표적 기념물이다.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서 볼 수 있는 놀랄 만한 볼거리 가운데 하나는 1893년 완성된 브래드베리 빌딩이다.

햇빛이 5층으로 된 건물의 내부를 밝고 따뜻하게 비추도록 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섬세한 프랑스식 철제 구조와 벨기에식 대리석, 멕시코산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1939년 지어진 유니언패신저 역은 성당처럼 웅장하게 지어진 전국의 철도역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것으로서, 스페인 선교 양식에 따라 지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1926년 지어진 센트럴 도서관은 버트럼 굿휴가 설계한 최후의 작품이다.

이 건물의 기본적인 골격은 파리의 보자르 건축양식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짙은 담황색 색조나 회반죽 치장 세공 등은 어빙 길의 건축물을 생각나게 한다. 이 도서관 건물 옆에는 1920년대의 아르데코 운동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멋지게 지어진 리치필드 빌딩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말 은행과 석유회사의 쌍동이 고층건물이 세워지면서 리치필드 빌딩은 사라졌다.

예술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윌리엄 포크너, F. 스콧 피츠제럴드, 올더스 헉슬리 등 뛰어난 작곡가나 작가들이 때때로 로스앤젤레스에 안주했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수없이 많은 소설의 소재가 되어왔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피츠제럴드의 〈최후의 대군 The Last Tycoon〉(1941), 헉슬리의 〈여러 해 여름이 지난 뒤 백조 죽다 After Many a Summer Dies the Swan〉(1940), 이블린 워가 지은 〈고인 The Loved One〉(1948), 너새니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하루 Day of the Locust〉(1939) 등이다. 그밖에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명이 로스 맥도널드인 케네스 밀러의 작품들도 대표적인 예다.

로스앤젤레스는 세계의 책 수집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시내에는 솔 마크스, 그랜트 댈스트럼, 워드 리치, 로스앤젤레스 고희귀서적판매상인협회의 회장인 제이크 자이틀린 등 훌륭한 인쇄업자들이 많이 있다. 자이틀린의 상점들은 해당지역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오는 작가·미술가·사진작가·장서가 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예술작품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매매지역으로서 활기를 띠기도 한다.

주요화랑들이 서부 할리우드의 라시에네가 대로와 멜로즈 대로에 있는 훌륭한 식당들, 골동품 가게들, 희귀서적 상점들 사이에 많이 흩어져 있다.

공연예술은 뮤직센터에서 공연된다. 뮤직센터에는 우아한 멋을 풍기는 도로시 챈들러 별관이 있는데, 이곳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본거지이다. 또한 연극이나 뮤지컬, 가벼운 오페라를 공연하는 아맨슨 극장이 있고, 실험적 무대 연출을 위해 설계된 케이크 모양의 마크테이퍼 포럼도 있다.

뮤직센터에 상주하는 오페라단은 없다. 1983년까지 뉴욕·런던·코펜하겐·모스크바 등에서 온 발레단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1983년에 로버트 조프리가 그의 단원들을 이끌고 뉴욕 시에서 도로시 챈들러 별관으로 옮겨왔다.

할리우드 볼은 할리우드힐스에 있는 음악당인데 골짜기의 지형을 이용한 천연 원형극장이다. 1916년 5월 19일 이 극장 최초의 공연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가 초연되었다. 그리고 1922년에 '별이 빛나는 밤의 교향악'이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그리피스 공원 안에 있는 그리스 야외극장에서는 다양한 하계 행사들이 펼쳐지는데 대부분이 음악 공연들이다. 1982년 재개관한 유니버설시티의 유니버설 원형극장에서는 1년 내내 공연이 계속된다. 이 극장의 좌석 위에는 둥근 천정이 있다. 할리우드의 헌팅턴 하트퍼드 극장은 1914년 〈스쿼맨 The Squaw Man〉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헛간 가까이에 있다. 센추리 시에 있는 슈버트 극장은 1880년대의 뉴욕을 재현한 대규모 세트로부터 몇 구획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세트는 〈안녕, 돌리! Hello, Dolly!〉(1969)를 영화화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영화계의 수도인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계속해서 작고 혁신적인 극장들이 생겨나고 있다.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을 제공하는 캘리포니아 주립 과학산업박물관이 익스퍼지션 공원에 있다. 미국에서 4번째로 큰 자연사박물관인 로스앤젤레스 군 자연사박물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 박물관이 소장했던 독특한 화석 수집품들은 핸콕 공원에 있으며 라브리어 발굴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조지 C. 페이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로스앤젤레스 군 미술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땅에 서 있다. 박물관은 마치 검은 타르 웅덩이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초 도쿄에 근거를 둔 건축가인 마라타 이소자케는 뮤직센터 가까이에 위치하는 현대미술박물관의 건설계획을 준비했다. 하일랜드 공원 안에 있는 사우스웨스트 박물관에는 아메리카의 토속예술작품과 고기물(古器物)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방대한 직물·항아리·바구니·사진과 토속예술에 관한 여러 책 등이 소장되어 있다.

'시민회관'에는 아이들이 직접 만져보며 관람할 수 있는 어린이 박물관이 있어서 생기를 더해준다. 반스댈 공원단지에는 시립 화랑 근처에 청소년 예술관이 있다.

패서디나에 있는 노튼 사이먼 박물관에는 2,000년에 걸친 유명한 예술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가까이 있는 샌머리노에서는 헨리 E. 헌팅턴 도서관·미술관·식물원이 공원 같은 쾌적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아늑함을 맛보면서 장미·동백·사막식물들을 감상한다.

일본식 정원도 눈길을 끌고 다량으로 소장되어 있는 희귀본, 필사본, 영국의 예술작품 등도 방문객들이 즐겨 보는 것들이다. 말리부 해변에 자리잡은 J. 폴 게티 박물관은 오래된 해변의 별장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1976년 이 박물관의 설립자가 7억 달러를 박물관에 기증한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박물관이 되었다. 시민들은 샌타모니카·버뱅크·베벌리힐스 등의 시에 있는 지방 도서관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로스앤젤레스 시나 군에서 운영하는 지역 도서관이나 각 지구의 도서관을 이용하기도 한다.

UCLA의 도서관은 전국적으로도 훌륭한 학술도서관으로 손꼽힌다. 윌리엄 앤드루스 클라크 기념도서관은 대학도서관은 아니지만 존 드라이든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어서 잘 알려져 있다.

역사

대도시권의 성장

1769년 8월 2일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가 이끄는 스페인의 원정대가 포교지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들은 강가에서 야영을 했고, 포르시운쿨라 천사들의 여왕인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그 강의 이름을 포르시운쿨라라고 지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찾은 최초의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이 있는 양나(Yang-na) 촌락에 사는 온순한 유토아스텍어족(語族) 인디언들과 선물까지 주고 받으며 호의를 나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이곳을 떠났다. 그들이 하룻밤 머무는 동안 지진이 3차례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안 크레스피 신부는 그의 일기에서 "강가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이 아름다운 곳은 거대한 정착지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다"라고 적었다.

2년 뒤, 야영을 했던 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에 산가브리엘아르칸겔 포교지가 세워졌다. 10년 뒤 펠리페 데 네베 총독이 이곳에 와 이 비옥한 강변 분지를 관리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44명의 신병들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대부분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1781년 9월 4일에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강 서쪽 지역에 글도 제대로 모르는 문맹의 정착민들이 모여들어 약속받은 땅을 요구했으나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신화 작가들은 시의 발전과 고귀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시의 이름에 걸맞도록 시의 건립사를 의례적으로 화려하고 웅대한 것으로만 다루어왔으며 실제 사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시의 명칭은 오랫동안 강의 이름과 혼동되어왔으나 지금은 시의 명칭이 엘푸에블로데라레이나데로스앙헬레스(스페인어로 '천사들의 여왕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대부분이 인정한다.

흔히 엘푸에블로라고 불렸던 초기의 시는 미국과 매우 고립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 출신의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지프 채프먼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영국인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채프먼은 보스턴에서 온 붙임성이 좋은 해적이었는데, 1818년 그의 동료 선원인 흑인 토머스 피셔와 함께 이곳에 상륙했다. 험한 육로를 거쳐 이곳에 도달한 최초의 이방인은 모피 사냥꾼인 제디다이아 스미스로 그는 1826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해는 독립국 멕시코가 엘푸에블로의 상공에 멕시코 국기를 올린 지 4년이 지난 해였다.

리처드 헨리 데이너가 이곳을 둘러보았던 1835년 로스앤젤레스는 시가 되었고 그당시 시의 인구는 약 1,250명이었다. 데이너는 1840년 발표한 〈2년 동안의 선원생활 Two Years Before the Mast〉이란 글에서 로스앤젤레스에 대해 "진취적인 사람들이 살게 되면 이곳은 얼마나 멋진 곳이 될까"라고 언급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때인 1846년경에 캘리포니아 주의 주도였던 이곳은 진취적인 개척자들이 넘쳤다(멕시코 전쟁). 피오 피코 총독은 '양키 이주민(뉴잉글랜드 지방의 이주민)들의 무리' 때문에 난처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양키 이주민들은 농장을 가꾸고, 포도원을 세우고, 방앗간을 세우고, 나무를 베고, 작업장을 만들 뿐 아니라 그밖에 자신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들일지 몰라도 캘리포니아인들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수천 가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1846년 8월 13일 존 C. 프리몬트 대위와 로버트 F. 스톡턴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대가 시로 들어왔는데 발포는 하지 않았다. 그 다음해인 1847년 1월 폭동이 발생했으나 진압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는 1850년 4월 4일에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로 지정되면서 미국 도시로서의 발전을 시작했다.

1849년 한 개척 의사는 "도박·음주·매춘만이 판을 치고 있는 곳" 이라고 로스앤젤레스를 비난했다. 무법천지인 이 점토 목우지대는 금광개발에 따른 골드러시에 힘입어 번창했다.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의 굶주린 광부들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쇠고기를 순식간에 소비했다. 그러나 여러 해 계속 소의 값이 떨어진 데다가 1862~65년에 참혹한 가뭄까지 겹쳐서 목우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스페인인과 멕시코인들이 소유했던 거대한 무상양도토지는 저당잡히거나 파산 지경에 처했다. 토지소유주들이 미국의 법이나 미국이 정하는 이자율을 몰랐기 때문에 소유지는 분할되거나 매각되었고, 새로운 정착자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1860년 무렵 시는 매우 미국적이 되어서 투우는 금지되었고 대신 야구 클럽이 생겼다.

서던퍼시픽 철도가 1876년 놓였고, 1885년 샌타페이 철도가 들어왔다.

철도가 놓이게 되자 로스앤젤레스에서 먼 동부지역까지 오렌지를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해서 서쪽의 새로운 에덴 낙원으로 이주해올 것을 호소했다. 철도 요금투쟁에 힘입은 1880년대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인구가 4배 이상 증가했다. 1880년에 1만 1,183명이었던 것이 1890년에는 5만 395명으로 늘었다. 크레스피 신부가 야영을 했던 곳은 빈틈없고 적극적인 양키 지지자들로 붐볐다.

그들은 마음 속에 그려왔던 시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이 풍성한 축복의 땅에서 부족한 것은 항구와 적절한 물의 공급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나 샌디에이고와는 달리, 로스앤젤레스에는 천연 항구가 없다. 좁고 교묘하게 손질된 얕은 물길이 가까스로 내륙과 시의 항구를 연결해준다. 항구는 시청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져 있다. 시에는 샌피드로와 윌밍턴 등 2개의 항구 지역사회가 있다.

이 항구 촌락들은 1909년 팽팽한 싸움을 벌이던 서던 퍼시픽철도회사와 '자유항구연맹'이 합병하면서 생긴 것들이다. 항구의 기능이 시작된 것은 1899년부터이고 최초로 시가 운영하는 부두가 개장된 때는 1914년으로, 파나마 운하가 완공된 해와 일치한다. 파나마 운하의 개통으로 대서양 연안에 있는 항구들과 로스앤젤레스 항구 사이의 거리가 약 1만 2,800km 단축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항은 미국 서부연안의 항구 가운데 가장 분주한 항구가 되었다.

시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일이 어려움에 부딪혔다.

새로운 급수원을 찾기 위해 궁리하던 수도국 관리자 윌리엄 멀홀랜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오언스 계곡을 조사한 뒤 과감한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남쪽 비탈로부터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을 송수로를 통해 로스앤젤레스까지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오언스 계곡의 목축업자들을 분노시켰고, 2개의 신디케이트를 구성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투기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나쁜 일을 한다는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이 사건은 지나치게 허구화되었고, 1974년 〈차이나타운 Chinatown〉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13년 11월 5일 수천 명의 시민들은 오언스 강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샌퍼낸도 계곡의 방수로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자리에서 멀홀랜드는 "자, 직접 보고 믿으시오"라고 말했다. 송수로는 길이가 372km이고, 독립된 터널들만 해도 142개나 되었다.

터널의 총길이는 약 83km, 모노 분지로 이어지는 연장선의 길이는 168km였다. 이 송수로는 시가 필요로 하는 급수량의 80%를 공급한다. 나머지 20%는 캘리포니아 송수로나 콜로라도 강 등의 지방 수원지에서 공급된다.

1976~77년에 극심한 가뭄이 닥쳤고 비슷한 재해가 1985년에도 일어났다. 그들의 급수지인 콜로라도 강의 물을 애리조나 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이 공표된 것이다. 당시 북부 캘리포니아에 내린 비와 눈으로 지표수의 3/4 가량이 채워졌다. 그러나 반 이상의 주민들이 남부에 살기 때문에 강력한 농민조합과 재기넘치는 도시의 환경보호론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물 전쟁'이 계속되어 법정·입법기관·투표장 등에서 부딪혔다.

현대의 도시

20세기초의 10년 사이에 로스앤젤레스의 인구는 3배나 증가해서, 약 10만 명이던 인구가 거의 32만 명에 달했다.

그동안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에 발생한 지진의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 지방 기업가가 1902년 미국 최초의 영화관을 개관했고, 또다른 기업가는 늘어나는 자동차를 수용할 수 있는 주유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펄 모튼과 코라 필립스가 경영하는 붉은 매춘지역 출신의 여자들은 양산을 든 채 여전히 무개마차를 타고 다녔다. 이들은 끊임없이 로스앤젤레스로 밀려드는 중서부지방 출신의 은퇴한 약제사, 치과의사, 밀 농사꾼들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스마트 세트 Smart Set〉지의 한 집필가는 1913년 3월호에서 "가치관이 치명적으로 병들었다"고 썼다.

그는 "시가 지나치게 팽창하여", 그결과 "심령주의자, 무당, 점성술사, 골상학자(骨相學者), 손금장이, 그밖에 모든 종류의 신비적 수다장이들로 들끓고 있다" 고 묘사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떠돌이 작가들은 똑같은 어조로, 시가 기괴한 것들의 공공연한 수용소나 다름없다고 되풀이했다.

"로스앤젤레스는 현실 부적응자들의 궁극적인 격리장소이다"라고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바 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이 말에 동의했다.

1940년 라이트는 "마치 미국을 거꾸로 뒤집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남부 캘리포니아 쪽으로 쏠리게 한 것 같다"고 로스앤젤레스의 과잉성장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후 몇 년 사이에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아놀드 쇤베르그,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루노 발터, 프란츠 베르펠, 리온 포이히트방거, 알프레드 노이만 등 재능이 뛰어난 유럽인들이 대거 로스앤젤레스로 망명해왔다. 그래서 '제4의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가 되었다.

시민들은 민족적·문화적·경제적 차이에 따라 서로 격리된 채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파도 타기·승마·스키·요트·하이킹·골프·테니스 등을 즐길 뿐이다. 세계의 어떤 시도 로스앤젤레스만큼 거리낌없이 태연하게 향락을 추구하는 곳은 없다. 시는 또 가장 많은 도시들 사이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모방되기도 한 반면 조롱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가 예시하는 어두운 미래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7년에 브루스 블리븐은 "미래의 문명이 뜨거운 통 안에서 뒤섞여 들끓고 있는 암울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도가니"라는 말로 로스앤젤레스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