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다른 표기 언어 Bartolomeu Dias
요약 테이블
출생 1450경
사망 1500. 5. 29, 희망봉 근처 해상
국적 포르투갈

요약 포르투갈의 항해가·탐험가. Dias는 Diaz라고도 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1488년 유럽의 탐험대를 이끌고 희망봉을 처음으로 발견,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일반적으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15세기에 대서양을 탐험한 포르투갈의 모험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디아스의 생애 초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도선사(導船士)였던 사람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입증되지 않고 있다. 디아스의 신분은 왕실에 속한 종신(從臣)으로서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디아스 데 노바이스라는 이름은 당대에 작성된 문서들에는 눈에 띄지 않고 1571년 디아스의 손자가 앙골라의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보여주는 증서에 유일하게 그 이름이 등장한다.

1474년 국왕 아폰수 5세는 아들 주앙(나중에 주앙 2세로 즉위)에게 기니와의 무역 감독과 아프리카 서부해안 탐사작업을 위임했다.

주앙은 아프리카 서부해안에 외국선박의 입출항을 봉쇄하고자 했으며 1481년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지점 확인을 위한 항해를 명령했다. 항해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왕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한 석주(石柱) 여러 개가 주어졌다. 당시 항해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디오구 은 콩고에 도착한 후 앙골라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해 남위 13°26' 지점의 산타마리아 곶에다 주앙 2세로부터 받은 석주 하나를 세웠다.

디오구 캉은 자신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귀족 작위와 함께 상을 받았다. 캉은 이후 재차 항해길에 올라 이번에는 남위 15°40'이 되는 지점에 석주를 세우고 크로스 곶에 또 하나의 석주를 세웠으며 남위 22°10'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주앙 2세는 캉이 인도양에 도달하기를 기대했으나 이같은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으며 캉으로부터 더이상의 소식은 전해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앙 2세는 새로운 탐험의 임무를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에게 맡겼다. 1486년 당시에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가네라는 곳에 한 위대한 통치자가 있으며 그가 바로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했다는 전설의 인물인 프레스터 존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주앙 2세는 그때 육로로 인도와 아비시니아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페루 다 쿠비양과 아폰수 파이바를 파견해 놓고 있었으며 또한 디아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찾아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선단은 디아스 자신이 승선한 '상크리스토방호'와 그의 동료 주앙 왕자가 지휘하는 '판탈레앙호' 그리고 페루 또는 디오구라는 디아스의 동생이 지휘한 보급선 등 모두 3척의 선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선단에는 당대의 뛰어난 도선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일찍이 캉 밑에서 항해에 참가했던 페루 데 알렌케르와 주앙 데 산티아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6세기 역사가 주앙 데 바루스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선단이 1486년 8월에 출항해 16개월 17일 동안 포르투갈을 떠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두아르테 파체코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등 당대의 다른 인물들은 디아스의 귀환 시점을 1488년 12월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출항시기는 1487년 8월로 추정된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캉이 과거에 세웠던 석주를 지나 12월 4일 '세인트바르바라의 땅'에 도착했으며 8일에는 월비스베이에, 그리고 26일에는 세인트스티븐 만(엘리자베스 만)에 도달했다. 디아스는 1488년 1월 6일 폭풍을 만나 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어 며칠 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뱃머리를 왼쪽으로 다시 돌렸으나 육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시 육지를 목격하게 된 것은 선로를 북으로 돌려 항해하고 난 뒤인 2월 3일이었다. 즉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곶을 보지 못하고 돌아 항해했던 것이다. 디아스는 그곳을 안그라데상브라스(세인트블레이스 만, 그날이 블레이스 축일이었음), 또는 그곳의 주민을 보고 목자만(牧者灣)이라고 명명했다. 디아스 선단에 동승한 흑인들은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이들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포르투갈인들을 보고 달아났으나 나중에는 되돌아와서 공격를 가했다.

탐험대는 안그라다로카(지금의 알고아 만)를 향해 계속 나아갔으나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간부 선원들의 견해를 수렴해 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포르투갈로의 귀환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항해를 계속하기로 의견일치를 보고 난 후 디아스의 선단은 리우 두 인판테에 도착했다.

이 지명은 '상판탈레앙호'의 도선사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지금의 그레이트피시(흐로트-비스) 강 부근이 거의 확실하다.

곶을 돌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귀환길에 올랐으며 그해 5월에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곶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사가 바루스는 디아스가 그 곶의 이름을 '폭풍의 곶'이라고 명명했으며 주앙 2세가 다시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아르테 파체코의 말에 따르면 희망봉이라는 이름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자신이 붙였다고 하는데, 파체코가 프린시페 섬에서 디아스와 합류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귀환 항해에 관해서는 디아스가 리우두레스가테(지금의 라이베리아에 있음)의 프린시페에 기항했으며 미나의 무역기지를 요새화했다는 사실 이외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디아스가 파드랑데상그레고리우에 남긴 표식 가운데 하나가 그레이트피시 강에서 대략 56km 정도 떨어진 폴스아일랜드에서 1938년 발견되었다.

또다른 표식 하나가 세인트크리스토퍼 만의 서쪽 끝에 세워졌었는데 그때문에 그곳의 지명이 디아스포인트로 명명되었다.

주앙 2세가 주최한 디아스 일행의 접견행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인도로의 항해계획이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육로로 인도를 찾아나선 페루 다 쿠비양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9년 동안 아무도 항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앙 2세의 계승자인 마누엘 1세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유명한 항해를 허가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대와 함께 미나까지 동행했다.

다 가마가 인도 서부의 항구에 도달한 후 포르투갈로 귀환하자마자 재차 함대가 편성되었다. 12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인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그들과 대규모 통상을 개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함대의 지휘는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맡았으며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에게도 소규모 선박 1척이 맡겨졌다.

이 함대는 희망봉으로 향하는 동안 대서양 서부해역까지 항해하면서 브라질의 에스피리투산투를 목격하기도 했다. 이 육지는 섬으로 생각되었으나 '진실한 십자군의 땅'이라 이름붙여졌다. 따라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브라질 발견에 참여한 셈이 되었다. 일행이 희망봉에 도달했을 때 디아스는 해상에서 실종되었는데 아마 처음으로 그가 항해했던 바로 그 해상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디아스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안토니우라는 아들을 두었다. 손자 파울루 디아스 데 노바이스는 앙골라 총독을 지냈으며 1576년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최초의 유럽인 도시 상파울루데루안다를 건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