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비양

쿠비양

다른 표기 언어 Pêro da Covilhã
요약 테이블
출생 1460경, 포르투갈 쿠비양
사망 1526 이후
국적 포르투갈

요약 포르투갈의 초기 아프리카 탐험가.
Pedro de Covilham (Covilhao)이라고도 씀.

포르투갈과 에티오피아 간의 관계를 수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어렸을 때 세비야의 두케 데 메디나-시도니아 가문에서 6, 7년간 일했으며, 1474년 후반 또는 1475년 전반기에 두케의 형제와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포르투갈에서 아폰수 5세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의 말과 무기 관리를 담당했다. 쿠비양은 아폰수 5세가 카스티야의 왕녀와 결혼한 후 플라센시아에서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을 때 동행했으며, 토로 전투에도 참전했다. 또한 루이 11세로부터 원조를 얻기 위해 왕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도 그와 동행했다. 그러나 이 방문은 성과 없이 끝났다.

아폰수 5세가 죽고 난 뒤부터는 그의 아들인 주앙 2세 밑에서 근위병의 종자로 일했고, 스페인에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쿠비양은 2번에 걸쳐 북아프리카로 파견되기도 했다. 첫번째는 상인으로 가장하여 틀렘센의 통치자와 우호관계를 맺는 업무를 수행했으며, 2번째는 후에 왕이 된 돔 마누엘을 위해 여러 필의 말을 구입하기 위해 페스로 갔다. 주앙 2세는 인도와의 향료 거래를 통해 이익을 얻고, 프레스터 요한이라고 알려진 아비시니아의 그리스도교 지도자와도 연락을 취하고자 했다.

당시 아비시니아인들은 이미 로마와 이베리아 반도를 방문했었다. 주앙은 디오구 (디오구 캄)을 보내 아프리카의 서부해안을 항해하도록 했다. 그는 콩고를 발견한 뒤 항해를 계속했으나 혼 곶에 이미 도달했거나 곧 도달할 것이라고 여겼던 그의 믿음은 실현되지 못했다. 주앙은 다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로 하여금 캉의 탐험을 이어받도록 했다. 이와 함께 육로로 탐험대를 보내 인도와 아비시니아의 위치와 무역에 관한 내용들을 보고하도록 했다.

1486년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위치한 베닌 왕국에서 보고가 있었으며 동쪽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 보고를 받았다. 이때 쿠비양은 인도로 파견되었으며, 아랍어를 할 수 있었던 종자 아폰수 데 파이바는 프레스터 요한을 찾고 기니에서 아비시니아에 이르는 길을 알아내기 위해 파견되었다.

둘은 1487년 5월 이탈리아 은행가의 신용장을 소지하고 포르투갈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간 뒤 배를 이용해서 나폴리와 로도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벌꿀거래상으로 가장해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갔던 이들은 병(病)을 얻고 물품들을 압류당하기도 했지만 다른 물건들을 사고 여장을 수습, 아덴으로 향하는 북아프리카인들과 동행하여 카이로에 도착했다. 카이로에서 헤어진 후 인도로 향했던 쿠비양은 칸나노르·캘리컷·고아 등을 돌아보고 1489년 10월에서 1490년 3월 사이에 페르시아의 호르무즈로 돌아왔다.

반면 아폰수 데 파이바는 아비시니아에 도착했다. 둘은 카이로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1490년말 또는 1491년 초반에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 쿠비양은 아폰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반면 주앙 2세의 명령으로 카이로에 온 2명의 전령은 임무를 완수하면 귀환하라는 명령을 쿠비양에게 전했다.

쿠비양은 주앙 2세에게 서면으로 그가 겪은 일들에 대한 보고를 한 뒤, 아비시니아로 다시 떠났다. 전령 중 1명은 호르무즈까지 동행한 뒤 돌아갔다. 그후 홍해로 간 그는 이슬람교도로 가장해서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했다. 1492(또는 1493)에 제일라에서 시나이 산을 보았고, 그곳을 떠나 대상인(隊商人)들과 함께 그의 여생을 보내게 된 아비시니아로 갔다.

쿠비양은 아비시니아의 에스켄테르 왕으로부터 환대를 받았으며, 한 지역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이 국가를 떠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아비시니아의 섭정이던 헬레나 여왕은 마트베이라는 아르메니아인을 포르투갈로 보냈다. 마트베이는 1512년에 고아의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에 이르고, 1514년에는 포르투갈에 도착했다. 그후 포르투갈의 대사가 아비시니아로 파견되었다. 초대 대사가 죽자 1517년 후임으로 임명된 돔 로드리구 데 리마가 일행을 이끌고 인도를 출발하여 1520년 12월 아비시니아에 도착했다.

늙었지만 건강했던 쿠비양이 이들을 맞아 안내하고 통역하는 역할을 했다. 1524년 이들이 돌아갈 때, 쿠비양과 그의 부인, 가족들은 귀로의 일부를 동행했다. 이때 쿠비양은 23세였던 자신의 아들을 돔 로드리구와 함께 보내 포르투갈에서 교육받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