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가마

바스쿠 다가마

다른 표기 언어 Vasco da Gama
요약 테이블
출생 1460, 포르투갈 시네스
사망 1524. 12. 24, 인도 코친
국적 포르투갈

요약 15~16세기 포르투갈의 항해가.탐험가. 서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개척했다. 주앙 2세의 아시아 항로 해로 개척 의지에 따라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함께 1497년 첫 번째 항해를 시작했으며, 1502년의 두 번째 항해는 캘리컷에 남겨두고 온 포르투갈인들이 살해당한 것에 보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524년의 세 번째 항해는 전임 총독의 무능함을 바로 잡기 위한 항해였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생애
  3. 첫 번째 항해
  4. 두 번째 항해
  5. 세 번째 항해
  6. 사후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

개요

15~16세기 포르투갈의 항해가이자 탐험가. 서유럽에서 희망봉을 거쳐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개척함으로써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포르투갈이 강대국이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생애

바스쿠 다가마는 1460년 포르투갈 남서부 알렌테호 주 해안에 자리잡은 시네스요소니의 사령관이었던 에스테방 다가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스쿠 다가마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그가 에보라 내륙 도시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1492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포르투갈 상선에 대한 약탈행위의 보복으로 다가마를 리스본 남부 세투발 항구와 포르투갈 최남단의 알그라브 주에 보내 프랑스 배들을 나포하게 했다. 바스쿠 다가마는 이 임무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항해가였던 엔리케 왕자의 정책에 따라, 주앙 왕은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개척하고, 당시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포르투갈 함대를 인도로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원정대의 지휘는 바스쿠 다가마의 아버지에게 맡겨졌는데, 그가 죽자 다가마가 뒤를 이어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바스쿠 다가마가 임명받은 과정은 불분명하다. 즉, 주앙 왕이 다가마를 선택하고 1495년 왕위에 오른 마누엘 왕이 그것을 확정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마누엘 왕이 그를 선택했던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또다른 견해는 처음에 다가마의 형 파울루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그가 승계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항해

1497년 7월 8일 바스쿠 다가마는 4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을 출항했다. 그 가운데 2척은 120t 정도의 중형 배로 돛대를 각각 3개씩 달고 있었으며, 명칭은 각각 '상가브리엘호'와 '상라파엘호'였다. 다른 2척은 소규모 50t짜리 '베리오호'와 200t짜리 저장선이었다. 이들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지휘하는 배와 동행해 케이프베르데 제도로 갔다.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이미 몇 해 전에 희망봉을 발견한 포르투갈의 항해사로서, 당시 지금의 가나에 속하는 황금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사호르헤다미나라는 서부 아프리카 성(城)으로 항해를 하는 중이었다.

바스쿠 다가마의 배에는 3명의 통역사가 있었는데, 2명은 아랍어 통역사였고, 다른 1명은 여러 가지의 반투 방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배에는 발견표식으로 세울 돌기둥을 싣고 다녀 항해에 어려움이 많았다. 7월 15일 카나리 제도를 거쳐서 26일 케이프베르데 제도의 상티아고에 도착, 8월 3일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뒤 기네아 만 해류를 피하기 위해 대서양 남부를 돌아서 희망봉으로 가는 순회로를 택한 바스쿠 다가마는, 11월 7일 현재 남아프리카에 있는 산타헬레나 만에 도착했다.

11월 16일 그곳을 출발했으나, 역풍으로 항해가 지연되어 11월 22일에야 희망봉을 돌았다. 3일 뒤 모셀 만에 정박해 한 섬에 돌기둥을 세운 뒤, 저장선의 해체명령을 내렸다. 12월 8일 다시 항해를 재개해 성탄절에는 나탈 해안에 도착했고, 1498년 1월 11일에는 나탈과 모잠비크 사이의 소하천 어귀에 닿아 5일간 정박했다. 바스쿠 다가마는 이 강을 리우두코브레(구리강)라고 이름지었다.

1월 25일에는 현재 모잠비크에 속하는 겔리마네 강에 도착해 돌기둥을 세우고, 리우두스본스시나이스(좋은 징조의 강)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많은 선원들이 병을 얻어 탐험대는 이 어귀에서 배를 수선하면서 잠시 쉬어야만 했다. 3월 2일 모잠비크 섬에 도착했는데, 이 지역의 거주민들은 포르투갈인들도 자신들과 같은 이슬람인이라고 믿었다.

이때 바스쿠 다가마는 주민들이 아랍 상인과 거래를 하며 당시 4척의 아랍 선박이 금·보석·향료 등을 싣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사실을 알았다. 또 그리스도교 지배자인 프레스터 존이 그 내륙에 살고 있으며 해안도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모잠비크 왕은 다가마에게 2명의 안내인을 보내주었는데 그중 한 명은 포르투갈인이 그리스도교도라는 것을 알고 도망쳤다.

탐험대는 4월 7일 지금의 케냐 지역인 몸바사에 도착했으며, 4월 14일 말린디에 정박했다. 이곳에서 인도 남서부 캘리컷으로의 항해로를 알고 있는 안내인을 데리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23일간 인도양을 항해한 뒤 인도 고츠 산맥을 발견했으며, 5월 20일 캘리컷에 도착했다. 바스쿠 다가마는 이곳에도 탐험대의 도착을 표시하는 돌기둥을 세웠다.

당시 인도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지였던 캘리컷에서 다가마는 힌두 통치자인 사마린에게 환영을 받긴 했으나, 결국 조약을 체결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다가마가 가져간 무역대상품들이 조악하고 값쌌기 때문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이슬람 상인의 적대감정이 개입된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바스쿠 다가마의 상품들은 아프리카 서부지역과의 거래에는 적합했지만 인도에서는 거의 수요가 없는 하급품이었다. 바스쿠 다가마가 이끈 탐험대와 사마린 사이의 긴장이 확대되자, 그해 8월 다가마는 캘리컷을 떠났다. 당시 다가마는 5~6명의 인도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마누엘 왕은 그 인도인들을 통해 인도 관습을 배울 수 있었다. 다가마는 1499년 1월 8일 말린디로 항해를 떠나기 전에 고아 근처에 있는 아지디브 섬을 방문했다.

역풍 때문에 아라비아 해를 건너는 데 거의 3개월이 걸렸으며, 많은 선원이 죽었다. 동료들의 수가 줄어들자 바스쿠 다가마는 말린디에서 상라파엘호를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이곳에서도 돌기둥을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다가마가 세운 마지막 돌기둥이었다. 2월 1일에는 모잠비크에 도착했으며, 3월 20일 상가브리엘호와 베리오호 2척이 함께 희망봉을 돌았다.

그러나 1개월 뒤 폭풍우 때문에 서로 헤어져 베리오호는 7월 10일 포르투갈 타구스 강에 도착했고, 바스쿠 다가마가 이끈 상가브리엘호는 항해를 계속해 아조레스의 테르세이라 섬으로 갔다. 여기서 바스쿠 다가마는 배를 리스본에 보내버렸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의 형 파울루가 테르세이아 섬에서 죽어 비탄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9월 9일 다가마는 혼자 리스본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성공적인 귀환소식은 9일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마누엘 1세는 다가마에게 '경'의 칭호를 부여하고 매년 1,000크루사도스의 연금과 토지를 수여했다. → 바르톨로뮤 디아스, 베리오호, 사마린, 상가브리엘호, 상라파엘호, 인도사, 캘리컷

두 번째 항해

바스쿠 다가마의 업적에 이어 마누엘 1세는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에게 13척의 배를 주어 캘리컷으로 보냈다. 이때 카브랄이 캘리컷에 남겨두고 온 포르투갈인들은 이슬람인들에 의해 선동된 힌두교도들에게 학살당했다. 이에 복수하기 위해 리스본에서는 새로운 함대를 조직해 인도양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켈리컷에 파견했다. 처음에는 카브랄이 함대의 지휘를 맡았지만, 나중에 바스쿠 다가마에게 지휘권이 넘겨져 1502년 1월 함대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바스쿠 다가마는 자신의 휘하에 놓인 10척의 배를 5척 단위의 소함대로 만들고, 각 소함대의 지휘권을 친척들에게 맡겼다. 1502년 2월에 출범한 함대는 베르데 곶을 거쳐, 6월 14일 동부 아프리카의 소팔라 항구에 도착했다. 다시 모잠비크에 잠시 들른 뒤, 지금은 탄자니아에 속하는 지역인 킬와로 향했다. 킬와의 통치자는 아미르 이브라임으로 카브랄에게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바스쿠 다가마는 아미르에게 포르투갈에 복속하지 않고 마누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면 킬와를 불사르겠다고 협박했으며, 결국 아미르는 그에게 승복하고 말았다.

그뒤 바스쿠 다가마는 남부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인도의 남서부, 캘리컷의 북부에 위치한 카나노레 항으로 향하는 항해를 계속했다. 이 항해중에 바스쿠 다가마의 함대는 후에 포르투갈의 인도 지배 중심지가 된 고아에 도착한 뒤 아랍인의 배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잠복했다. 며칠 후 아랍의 배가 상품과 200~400명의 승객을 싣고 도착했다. 승객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다가마는 배를 습격해 승객들을 배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질러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이 사건은 다가마가 행한 가장 잔인한 행위였다.

바스쿠 다가마는 사마린의 적이었던 카나노레의 통치자와 동맹을 맺고 캘리컷으로 향했다. 사마린이 우호를 청했지만 바스쿠 다가마는 이를 거절하고, 항구에서 이슬람인을 추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항구를 폭파하고, 장식품을 팔기 위해 자신의 배에 온 38명의 힌두인 어민을 잡아 학살했다. 그들의 시체는 배 밖으로 버려져 해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그뒤 포르투갈인들은 코친 항으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항해했다.

이때 사마린의 적이었던 코친의 통치자도 동행했는데 그들은 당시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한편 사마린이 바스쿠 다가마를 초대한 것이 그를 생포하려는 의도였음을 알게 된 포르투갈인들은 캘리컷 연안에서 아랍 함대와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그들은 모두 미리 도망쳐버렸다. 1503년 2월 20일 귀향길에 오른 다가마는 모잠비크를 향해 카나노레를 출발한 뒤 10월 11일 타구스에 도착했다.

세 번째 항해

바스쿠 다가마의 귀환은 매우 미묘한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며, 그 역시 자신의 업적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당시 바스쿠 다가마는 시네스 시의 통치권을 약속받았으나, 상티아구 수도회(일종의 종교단체)가 이를 거부하자 시에스 시의 지배권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노정되었다.

한편 바스쿠 다가마는 1500년경 첫번째 항해를 마친 뒤, 훌륭한 가문의 카테리나 데 아타이데와 결혼해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사직한 뒤에는 에보라 시에 가서 살았으며, 여러 가지 특권과 상금도 받았다. 1505년까지 다가마는 계속 인도문제에 대해 왕에게 조언을 했으며, 1519년에는 비디게이라 주를 세웠고, 백작 지위에 올랐다.

마누엘 왕이 죽고 그 뒤를 승계한 훈 3세는 1524년 바스쿠 다가마를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다. 9월 고아에 도착한 다가마는 전임 총독의 지배하에 빚어진 행정적 혼란을 바로잡는 데 진력했다. 그러나 과로 등의 몇 가지 이유로 병석에 누워, 결국 그해 12월 코친에서 죽었다. 다가마의 시신은 1583년 포르투갈로 보내졌다.

1524년 인도 통치를 담당하는 Eduardo de Munezes의 무능함으로 인해 그를 대신하기 위해 바스쿠 다가마가 파견된다. 하지만 고아(Goa)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1524년 12월 24일 코친(Cochin)에서 숨을 거둔다. 포르투갈 리스본 벨렘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포르투갈이 강대국이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사후

인도와 포르투갈은 인도 항해 500주년 행사를 추진했지만 인도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에는 바스쿠 다가마의 이름을 딴 바스쿠 다가마 대교, 바스쿠 다가마 타워, 바스쿠 다가마 쇼핑센터 등이 있다. 리스본의 벨렘에는 바스쿠 다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바스코 다가마의 조각상이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