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브랄

카브랄

다른 표기 언어 Pedro Álvares Cabral
요약 테이블
출생 1467/68, 포르투갈 벨몬테
사망 1520, 산타렘(?)
국적 포르투갈

요약 포르투갈의 항해가.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브라질을 발견했다(1500. 4. 22). 귀족인 페르낭 카브랄과 이사벨 데 고베이아 사이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왕에게 봉사해온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의 눈에 들어 1497년 다양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 특권 가운데에는 수당 지급과 국왕의 고문이라는 칭호, 그리고 일종의 군대인 그리스도 기사단의 의복착용도 포함되었다. 3년 뒤에 왕은 그에게 '왕실의 귀족인 페드랄바레스 데 고베이아에 대한 크나큰 신뢰'를 표명하면서, 제2차 대규모 인도 원정대의 지휘를 맡겼다. 13척의 군함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된 카브랄은 1500년 3월 9일 리스본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바스코 다 가마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가면서 상업적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전임자가 시작한 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할 예정이었다.

다 가마가 첫 항해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전수한 가르침에 따라 카브랄은 바람이 없어서 범선이 항해하기 힘든 기니 만을 우회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나아갔다. 이 항로(훗날 '브라질 우회로'라고 불리게 됨)는 기니 만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이점을 갖고 있었다. 첫 항해 때 포르투갈인들이 목격한 바 있는 서쪽 육지는 스페인과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에 따라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는데, 그때 그 육지의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탐사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순조롭게 서쪽으로 항해하던 4월 22일에 카브랄은 처음 보는 육지를 발견하고, '참 십자가의 섬'(Island of the True Cross)이라고 명명했다. 나중에 마누엘 왕이 '성 십자가'(Holy Cross)라고 개명한 이 나라는 결국 그곳에서 발견된 염료 나무인 '파우브라실'(pau-brasil)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의 브라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카브랄은 그가 타고 온 카라벨(소형 쾌속범선)로 원주민을 초대하는 등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그 나라의 정식 소유권을 차지하고, 포르투갈로 배 1척을 보내 왕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후에 만들어진 이 지역의 지도에는 포르투갈이 경계선조차 분명하지 않은 이 거대한 땅의 통치자로 표시되었다. 이 땅은 그후 유럽에서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으로 가는 긴 항로의 중간 기항지가 되었다. 카브랄은 10일간 브라질에 머문 뒤 인도를 향해 떠났는데 이 항해 도중 함대가 희망봉을 돌고 있던 5월 29일 배 4척이 침몰했다.

이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1488년에 희망봉을 처음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도 끼어 있었다. 나머지 배들은 1500년 9월 13일 인도 캘리컷에 닻을 내렸다. 그곳의 '자모린'(이슬람 통치자)은 카브랄을 환영하고, 그에게 요새화한 교역소를 짓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이슬람 상인들과 포르투갈인 사이에 곧 분쟁이 일어났고, 12월 17일에는 대규모 이슬람군이 교역소를 공격했다.

포르투갈 수비대는 항구에 정박중인 포르투갈 함대에서 증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거의 다 전사했다. 카브랄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캘리컷 시를 포격한 다음, 이슬람 선박 10척을 나포하여 그 배의 승무원들을 처형했다. 이어서 배를 타고 더 남쪽에 있는 인도의 코친 항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정중한 대접을 받고 귀중한 향료를 사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남아 있는 6척의 배에 향료를 실었다.

또한 같은 해안에 있는 카랑골로스와 카나노르에도 입항하여 화물을 마저 싣고, 1501년 1월 16일 포르투갈을 향해 귀로에 올랐다. 그러나 항해 도중 배 2척이 침몰하여, 카브랄이 1501년 6월 23일 포르투갈의 타구스 강 어귀에 도착했을 때에는 배 4척밖에 남지 않았다.

마누엘 왕은 이 항해가 겪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에 만족했다.

마누엘 왕은 처음에는 카브랄을 좀더 강력한 새 원정대 대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가마를 임명했다. 왕이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새 함대 내부의 권한 분배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포르투갈을 떠나 인도로 가는 모든 함대의 지휘권을 이미 보유하고 있던 다 가마가 카브랄의 원정대가 당한 재난을 보면 카브랄은 새로운 임무를 맡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카브랄의 임명에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카브랄은 더이상 포르투갈 궁정에서 유력한 지위를 얻지 못했다.

그는 포르투갈의 베이라바이샤 지방에 있는 영지로 은퇴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브라질의 역사가 프란시스쿠 아돌푸 바른하젠은 1848년에 산타렘에 있는 그의 무덤을 확인했다. 카브랄이 탄생한 지 500년이 되는 1968년에 브라질과 포르투갈은 합동 축제를 벌이고 '함대 사령관'을 추모했다. 리우데자네이루와 리스본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