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대중

다른 표기 언어 金大中 동의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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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4. 1. 8, 전남 신안
사망 2009. 8. 18, 서울
관련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1973),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 광주 민주화 운동(1980), 제15대 대통령선거(1997), 남북정상회담(2000)
국적 한국
직업 정치인,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수상 노벨상 평화상(2000)
후광(後廣)

요약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납치·테러·사형선고·투옥·망명·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졌다. '인동초',·'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목차

펼치기
  1. 정의
  2. 초기 생애
  3. 정계 입문
  4. 김대중 납치 사건
  5. 재야활동과 투옥
  6. 정치활동 재개
  7. 제15대 대통령 당선
  8. 대통령 재임 시기
    1. IMF체제 극복
    2. 첫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성명
    3. 혁신적인 정책 시행
    4. 노벨 평화상 수상
  9. 퇴임 이후 말년

정의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정치가. 호는 후광(後廣)이다.

김대중
김대중

초기 생애

김대중은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중의 호인 후광(後廣)은 당시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하의보통학교에 입학했고, 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한 뒤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졸업한 뒤 대학진학을 포기한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8·15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나자 이 회사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목포일보〉 사장(1948~50)을 지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는 해상방위대 전라남도지구 부대장(1950),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1951), 흥국해운·대양조선공업 사장(1951)을 역임했다.

정계 입문

김대중은 1954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제4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데 이어 2차례 더 낙선했다.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 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강제해산되는 바람에 의원등록조차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6·7·8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대변인(1960), 통합야당 민중당 대변인(1965),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1966), 신민당 대변인(1967)을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마침내 3선개헌 다음해인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되었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의원이 함께 출마해 3파전으로 진행된 이 전당대회에서 소수파인 그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에 밀려 2위에 그쳤으나 2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의 김영삼 지지에 반발한 이철승이 지지표를 몰아줌으로써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선거과정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진 선거부정을 빗대어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 중이던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다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해 대일관계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되었다.

재야활동과 투옥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이듬해 3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신정권은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켰다. 그러나 그는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12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감행, 정국을 얼어붙게 했다.

이때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었다. 정부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시민군이 무력으로 맞선 5·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일본·독일·프랑스를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정치활동 재개

김대중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그가 김영삼과 함께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제12대 총선에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데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29선언으로 후퇴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김대중은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에 대항하여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지지표가 분산되면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김대중은 책임을 지고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자,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위기를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통해 돌파했다. 김대중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요약되는 이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신민연)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해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했다.

1992년 12월 18일 그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원직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충격적이고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제15대 대통령 당선

하지만 그는 1995년 6·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7월에는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애써 무시하며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제1야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김대중은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시기

김대중의 당선은 정부수립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IMF체제 극복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IMF 관리체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개혁 등의 정책을 펴서 IMF에서 빌린 부채를 예정보다 앞선 2001년 전액상환하였다.

첫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성명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 확대, 경의선·동해선 연결 및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화해·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혁신적인 정책 시행

또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여성부 신설, 정보통신(IT)산업 기반정착 등 인권과 복지분야에서 개선을 이룩해냈으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민주당에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제를 도입해 젊고 개혁적인 정치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

김대중은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2000년 한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4년여에 걸친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을 뿐 아니라, 대(對) 미국 관계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월드컵·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2007년 베를린자유대학의 제1회 자유상 등을 수상하였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명예법학박사,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명예문학박사, 전남대학교 명예인문학박사 등의 학위를 받았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평화를 위하여〉, 〈민족의 내일을 생각하며〉, 〈공화국연합제〉, 〈한국: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나의 길 나의 사상〉, 〈후광 김대중대전집〉(전15권), 〈21세기 시민경제이야기〉등 수많은 저서를 냈으며, 1992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퇴임 이후 말년

김대중은 2003년 2월 퇴임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새천년민주당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을 때나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 탄핵당했을 때 등 주요 정치상황마다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였고,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국외로는 유럽 및 미국, 세계식량계획(WFP) 등의 국가 및 기구를 순방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노벨위원회·세계보건기구(WHO) 등에서 연설하는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였다.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8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서거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6일장 국장으로 정해졌고, 북한의 조문사절단을 비롯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11개국에서 조문사절단이 들어왔으며, 42개국에서 조전을 보내왔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사이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