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신민당

다른 표기 언어 新民黨

요약 1967년 2월 7일 야당계열인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하여 창당되었다. 강령은 인권존중, 반독재민주주의 국가 완성, 민생안정, 사회악 일소, 민주적 평화통일 등이었다.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윤보선이 당 일선에서 물러나자 유진오·유진산 등이 주도권을 잡았다. 1970년 9월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선거돌풍을 일으켰으나 그뒤 유진산계와 반유진산계로 양분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된 뒤 반유진산계의 의원들이 민주통일당을 창당함으로써 또다시 분열되었다. 1979년 김영삼이 총재에 선출되었으나 민주공화당에 의해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김대중이 복권된 후 신민당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분열되다가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의 공포와 함께 해산되었다.

신민당
신민당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1967년 2월 7일 야당계열인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하여 창당되었다. 전통야당의 맥을 이어받은 신민당의 강령은 인권존중, 반독재민주주의 국가 완성, 민생안정, 사회악 일소, 민주적 평화통일 등이었다.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이 당 일선에서 물러나자 유진오·유진산 등이 주도권을 잡았다. 1970년 9월 29일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선거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뒤 유진산계와 반유진산계로 양분되어 법정투쟁을 벌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된 뒤 반유진산계의 일부의원들이 민주통일당을 창당함으로써 또다시 분열되었다.

1974년 8월 김영삼이 총재가 되어 대여(對與) 강경노선을 전개했으나 당내파동으로 실권했고, 1976년 9월 이철승이 당권을 장악함으로써 대여 온건노선인 중도통합론(中道統合論)을 지향했다.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보다 1.1%나 더 높은 득표율을 얻기도 했다. 1979년 5월 김영삼이 총재에 선출되어 대여 강경노선을 굳혔으나 민주공화당에 의해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처분되었다.

김대중이 복권된 후 신민당은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로 분열되다가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의 공포와 함께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