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김영삼

다른 표기 언어 金泳三 동의어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요약 테이블
출생 1929. 1.14, 경남 거제(호적상에는 1927. 12.20)
사망 2015. 11. 22, 서울
국적 한국
직업 정치인,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거산(巨山)

요약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9선 의원을 지냈으며, 김대중과 함께 한국 정계의 주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92년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문민정부의 문을 열었다. 재임 초기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적 조치를 취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으나, 임기 말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적 위기 상태에서 김대중 정부에게 정권을 물려주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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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
  2. 초기 생애
  3. 정계 입문
  4. 제14대 대통령 당선
  5. 대통령 재임 시기
    1. 공직자 재산 공개
    2. 하나회 척결과 군대 개혁
    3. 금융실명제 실시
    4. 반복된 대형 참사
    5. 북핵 위기
    6.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7. 5공 청산
    8. 신한국당 창당
    9. 세계화 정책 실시
    10. 임기 말 발생한 외환위기
  6. 퇴임 이후 말년
김영삼
김영삼

정의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정치가. 호는 거산(巨山)이다.

초기 생애

김영삼은 1929년 1월 14일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의 큰달섬에서 아버지 김홍조와 어머니 박부연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홍조는 두 아들을 어려서 잃었기 때문에 김영삼은 외아들로 자랐다. 김영삼 집안은 거제도에 멸치 어장을 가진 지역 유지였다. 조부 김동옥은 자기 땅에 교회를 지을 정도로 마을사람들에게 신문물과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매우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여덟 살에 장목보통소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통영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일본 학생들과 자주 다툼을 벌이다 정학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는데, 이때 장래 희망을 대통령으로 정하고 당시 하숙집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붙였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김영삼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1948년 9월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 외무부장관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외무부 장관이던 장택상을 알게됐다. 장택상은 이듬해인 1950년 5월 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김영삼에게 선거 운동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김영삼은 대학친구 20여 명과 함께 경북 칠곡으로 내려가 40여일 동안 선거운동을 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김영삼은 서울에 숨어 지내다 이듬해 1.4 후퇴 때 서둘러 남하하여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그는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이 되어 8개월동안 정훈병으로 활동하다 국회부의장이 된 장택상의 인사 담당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1년 3월 손명순과 결혼했다.

정계 입문

김영삼은 1954년 5월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김영삼은 이기붕의 권유에 따라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경남 거제군의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의 나이 28세로 한국 정치사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웠다. 김영삼은 제3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1980년대 정치 규제 조치로 출마하지 못한 11,12대 총선을 제외하면 1992년 총선까지 모두 9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것도 최다선 기록이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이후 김영삼은 자유당 인사 10명과 함께 탈당했다. 1955년 4월에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김영삼은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조병옥과 유진산이 이끌던 민주당 구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58년 5월 4대 총선에서 김영삼은 부산 서구에 출마했으나 경남도지사와 내무부 차관을 지낸 자유당의 이상용에게 밀려 낙선했다. 4.19 혁명이후 1960년 5월에 실시된 총선에 김영삼은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같은 해 9월 거제도의 김영삼 본가에 무장간첩이 침입해 어머니 박부연이 총을 맞고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김영삼은 거제도에 있었고, 바로 상경했다. 반란 직후 박정희 정권로부터 공화당 창당이나 군정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완강하게 거부했다. 1963년 3월 박정희 군정 연장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63년 11월 김영삼은 야당 가운데 민정당 소속으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부산 서구에서 당선되었다. 1964년 민정당과 민주당이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민중당으로 통합됐는데 김영삼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민중당 원내총무에 선출됐다. 1967년 신민당이 창당되고 김영삼은 신민당 원내총무가 됐다.

1969년 6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강도높게 비판하던 김영삼은 집 근처에서 괴한들이 초산이 든 병을 승용차에 던지는 테러를 당했다.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공화당이 단독으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김영삼은 젊은 지도자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40대 기수론을 주장했다. 1970년 9월 29일 김영삼을 비롯한 김대중, 이철승 등의 40대 젊은 정치인들이 대선후보 경선을 치렀다.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1위를 차지했으나 김대중-김영삼의 2차 투표에서는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김영삼은 신민당을 탈당하지 않고, 유세 과정에서 '김대중의 승리는 곧 자신의 승리'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95만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을 일으켰을 때 김영삼은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박정희의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김영삼은 바로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영삼은 가택연금됐다.

김영삼은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어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1974년에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로 선출됐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정치활동 보장을 요구하고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했다. 이때문에 개헌을 거론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1979년 8월 YH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김영삼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가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단독으로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가결했다. 이때 김영삼은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말했다. 김영삼이 제명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같은해 10월 박정희가 피살되며 유신정권이 끝났다.

1980년 신군부의 '5.17조치'로 김영삼은 서울 상도동에서 가택연금됐다. 이듬해 5월 가택연금이 풀리자 주변 야당 동지들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조직, 고문으로 추대됐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야당인사 석방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의 출국 권유에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거절했다. 김영삼은 1984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198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은 1985년 12대 총선에서 야당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이 됐다. 당시 야권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자, 김영삼은 뜻을 같이한 김대중과 함께 탈당하여 통일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 6월 항쟁 결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며 대통령 후보었던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자 김영삼은 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는 결렬됐고, 김대중은 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대선에는 노태우(민정당), 김종필(공화당)까지 출마해 '1노3김'의 대결이 펼쳐졌다. 김영삼은 2위(28%)로 낙선했다.

김영삼의 통민주당은 1988년 4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평민당에 이어 제2야당으로 전락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에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추진했다. 김영삼은 보궐선거 과정에서 상대 후보 매수건으로 오른팔인 서석재가 구속되며 궁지에 몰리자 전격적으로 3당 합당에 합의했다.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이 발표되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창당되자,당내 반발이 심했으나 결국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은 새로운 보수 대연합당인 민자당으로 들어갔다. 민자당의 대표가 된 김영삼은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1992년 3월 14대 총선에서 3당 통합 당시 개헌선도 넘는 의석수를 차지했던 민자당은 과반수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민정계는 김영삼에게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우며 비판했으나, 김영삼은 탈당을 거론하며 자신이 아니면 민자당의 정권 재창출은 불가능하다고 반격했다. 결국 김영삼은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제14대 대통령 당선

1992년 대통령 선거에는 김영삼, 김대중과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일을 불과 3일 남기고 부산의 기관장이 모여 김영삼을 지원하자고 결의한 일이 벌어지는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은 한때 곤경에 처했으나 오히려 불법도청이 문제로 불거지고 부산의 민심이 김영삼으로 집결하며 반전됐다.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42%를 득표하여 김대중을 약 194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듬해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재임 시기

김영삼은 자신의 정부를 '문민 정부'라고 명명하고, 취임한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했다. 이어 공직자 재산 공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 잇단 개혁 조치를 시행, 재임 초기 국정 지지도가 90%를 넘어서는 등 국민적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공직자 재산 공개

김영삼은 취임 이틀 후 공직자 재산 공개를 추진했다. 먼저 자신의 재산(17억 7822만 원)을 공개하고 국무총리, 부총리, 감사원장, 민자당 대표 등 공직자들이 재산을 공개했다. 재산 공개 과정에서 투기를 통한 축재 의혹이 있는 공직자나 부도덕한 재산 증식 혐의가 있는 인사는 물러나야 했다. 국회는 같은 해 5월 20일 공직자 윤리법을 개정해 4급 이상 공직자는 모두 재산 등록을 의무화하고 1급 이상 공직자는 재산 공개를 의무화했다.

하나회 척결과 군대 개혁

김영삼 정부는 취임한 지 2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3월 6일 군대개혁을 시작했다. 1993년 3월 8일 국군참모총장, 국군기무사령관 등 군 요직의 인사를 단행해 군부의 핵심에 두루 포진하고 있던 하나회 세력을 축출했다. 비리와 무기구입 관련 비리에 대한 감사 작업을 병행했다. 대장 계급 7명, 중장 이하 장성급 12명이 옷을 벗었고, 감옥으로 간 장군도 있었으며, 하나회 명단에 오른 장성급은 대부분 강제로 예편됐고, 영관급 인물들은 거의 주요 보직에서 밀려났다.

금융실명제 실시

김영삼은 1993년 8월 12일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를 발동해 금융실명제를 시작했다. 당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긴급제정명령'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내용은 △비실명 계좌와 실명 확인 없는 현금 인출 금지 △순 인출 3000만 원 이상의 경우 국세청에 통보하며 자금 출처를 조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금융실명제는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3일은 오후 2시부터 금융기관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금융실명제가 위헌이라는 헌법 소원이 제출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의 규모를 줄이고 부정부패 자금을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또 금융자산의 흐름을 투명하게 파악하고 종합소득세를 실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복된 대형 참사

김영삼 정부 시기 대형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 경 경부선 구포역 북쪽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됐다. 승객 600명 중 78명이 목숨을 잃고 중상자 51명, 경상자 105명이 발생했다. 한진건설이 지하 전력구 공사를 하며 발생한 토사유출로 선로 지반이 붕괴해 생긴 사고였다.

4개월 여 후 7월 26일 김포에서 출발해 목포로 가던 아시아나 항공기가 전라남도 해남의 야산에 추락해 탑승객과 승무원 66명이 목숨을 잃고 44명이 부상을 입었다.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앞바다에서 서해 페리호가 정원 초과와 과적으로 침몰해 승선 인원 362명 중 292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경 한강의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이때 승용차 2대와 봉고차 1대 버스 1대가 추락했고, 무려 32명이 사망했다. 불과 3일 뒤인 10월 24일 충주호 유람선에서 불이나 25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0분 경 대구 달서구 상인동 영남중고등학교 앞 지하철 1호선 1~2구간 공사장에서 잘못된 시추 작업으로 파손된 도시가스관에서 유출된 도시가스가 폭발했다. 학생과 시민 101명이 사망하고 117명이 부상당하는 대형참사였다. 파손된 건물이 119동, 차량 133대가 추락하거나 화염에 휩싸였다.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관 폭발 사고 일어난 지 불과 두달뒤인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됐다. 백화점 규모는 4600여 평에 지상 5층, 지하 4층의 건물로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 이어 전국 2위였다. 백화점 붕괴로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동안 지속되던 대형 참사 중 가장 큰 사고였다. 부실시공 무원칙적인 보수 공사가 원인으로 찍혔다.

북핵 위기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1992년부터 핵시설 문제를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 출범 보름 만인 1993년 3월 12일에 핵환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1991년 12월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깨는 것이다. 미국 국방부는 전면전 가능성을 검토했고, 북한도 전쟁 불사를 내세웠다.

김영삼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클린턴 대통령을 적극 설득했다. 미국에서는 지미 카터가 중재자로 나섰다. 카터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하고 미국이 북한에 핵 공격위협을 하지 않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지원한다면 북한도 핵 개발 계획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은 김일성과 카터의 합의를 받아들였다.

카터는 북한에서 돌아오는 길에 김영삼에게 들러 김일성이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했고 김영삼은 남북정상회담을 수락했다. 이후 고위급 회담 끝에 7월 25일에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했으나 회담을 17일 앞둔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지병으로 사망했고, 조문 파동이 일어나 북한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는 대신 북한은 핵을 동결하고 한반도 핵환산금지조약에 복귀함으로써 한때 전쟁까지 나돌았던 위기상황은 종결됐다.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김영삼은 대선 때 지방자치의 전면 실시를 공약했다. 당시 1991년 기초 및 광역의회의 구성으로 30여 년만에 지방자치가 부활했으나 자치단체장은 여전히 임명제를 유지하고 있어서 완전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영삼은 1994년 도·농 통합 방식의 대규모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고, 1995년 6월 27일 광역단체장과 기초자치단체장, 광역지방의회 의원과 기초자치단체 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르는 4대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했다.

5공 청산

1995년 10월 노태우의 4천억 비자금설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전두환·노태우를 구속 수사하고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비등했다. 11월 24일 김영삼은 '역사바로세우기로 제2의 건국을 해야한다'며 정기국회 회기 내에 5.18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민자당에 지시했다.

전두환은 소급입법에 의한 정치보복이라고 반발했으나 검찰은 11월 30일에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고향인 합천 생가에 머물고 있던 전두환을 검거하여 12월 3일에 구속횄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의 추징액은 2205억 원, 노태우의 추징액은 2628억 9600만 원이었다.

신한국당 창당

민자당은 1995년 처음 열린 6.27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통합민주당이 서울, 전남, 전북, 광주 4개 지역에서 이기며 승리했다. 김종필은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한 상태였다.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민주당은 이기택이 이끄는 '꼬마민주당'과 김대중의 국민회의로 나뉘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김영삼은 1996년 2월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1996년 4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해 대대적인 인사 영입을 시도했다. 영입된 인사들은 이회창, 박찬종,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맹형규 등이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을 차지했다. 이후 김영삼은 자민련과 꼬마민주당, 무소속 의원들 중 일부를 영입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세계화 정책 실시

김영삼은 취임 2년 되던 해 김영삼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린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세계화'를 정부 주요 정책으로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김영삼 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1995년 1월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동시에 주요한 회원국으로 활동했다. 또 선진국 클럽으로 알려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1996년 12월 29일 가입했다.

임기 말 발생한 외환위기

제14대 대통령 임기 종료를 1년 여 앞둔 1997년 1월 재계 14위의 한보사태가 터졌다. 한보그룹의 핵심 기업인 한보철강이 규모 5조 7000억 여원의 부도를 낸 것으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 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유착하며 부정비리가 빚어진 사실이 드러나 정치인과 은행장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

이런 혼란 가운데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한보에 이어 삼미, 한신공영 등이 법정 관리 신청을 했고 재계 8위의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냈다. 이어 쌍방울, 바로크가구, 뉴코아, 한라그룹, 청구 등이 부도를 냈다. 기업의 부도사태는 금융업체들의 부실로 이어졌고 숱한 직장인들이 실직자가 되었으며 한국의 신용도는 투자 부적격 단계로 하락했다.

급기야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이르렀다. 김영삼의 지지도는 급전직하 하락했고 자신이 세운 신한국당으로부터 퇴출됐다.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고, 김영삼은 1998년 2월 25일 퇴임, 상도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퇴임 이후 말년

김영삼은 퇴임 이후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면서도 현실 정치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촌평을 펼치기도 했다. 2015년 11월 22일 오전 0시 22분 패혈증과 급성신부전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참고

  • ・ 대한민국 역대 정부 주요 정책과 국정운영-김영삼 정부, 한국행정연구원, 대영문화사, 2014년
  • ・ 한권으로 읽는 대한민국대통령실록, 박영규, 웅진지식하우스 2014년
  •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상·하, 김영삼, 조선일보사, 2001
  • ・ 한겨레, 민주화 큰 산 떠나다, 2015년 11월 22일
  •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185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