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트

그랜트

다른 표기 언어 Ulysses S. Grant
요약 테이블
출생 미국 오하이오 포인트플래전트, 1822. 4. 27
사망 1885. 7. 23, 뉴욕 마운트맥그레거
국적 미국

요약 남북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총사령관을 지냈으며, 뛰어난 전략과 지휘로 북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1869년 46세의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39명의 동급생 가운데 21등을 했지만 승마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수학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공격적인 작전으로 도넬슨 요새를 공격해 약 1만 5,000명의 포로와 요새를 손에 넣었다. 이것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거둔 최초의 대승리였다. 이후 곧 북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태환제도를 만들었으며, 남부 연합 지도자들에 대한 사면을 지지했고, 흑인의 평등을 옹호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목차

접기
  1. 초기생애
  2. 남북전쟁
  3. 북군 총사령관
  4. 대통령시절
  5. 만년
그랜트(Ulysses S. Grant)
그랜트(Ulysses S. Grant)

초기생애

그랜트는 피혁공장을 경영하는 제시 루트 그랜트와 한나 심프슨 그랜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기를 몹시 싫어해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말 다루는 데 상당한 솜씨를 익혔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39명의 동급생 가운데 21등을 했지만 승마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수학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1843년에 졸업한 뒤 미육군 제4보병대 소위로 임관되어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근처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줄리아 보그스 덴트와 사랑에 빠져 1848년 결혼했고 4명의 아이를 낳았다.멕시코 전쟁(1846~48) 때 그랜트는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끈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그뒤 윈필드 스콧 장군의 부대로 옮겨가 연대 보급계 및 병참부 장교로 일했다.

이때 군대 보급에 관한 값진 지식을 얻었지만 혈기왕성한 젊은 장교는 전투에 나가고 싶어서 애를 태웠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활약하여 중위에서 대위로 명예임관을 받았다.

미주리 주에 있는 화이트헤이벤의 덴트 영지에 자리잡은 그는 아내 줄리아가 아버지한테서 받은 30㏊의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으나 농사에 실패했고, 1859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부동산회사를 공동경영했지만 이것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1860년 그랜트는 형제들이 경영하고 있는 아버지 소유의 가죽제품회사에 일자리를 얻어 일리노이 주 걸리나로 갔다.

남북전쟁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그랜트는 걸리나에서 신병을 모집하고 장비를 갖추어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을 거들다가 부대와 함께 스프링필드로 갔다.

그곳 주지사인 리처드 예이츠는 그를 참모로 임명하고 주(州) 군무국장 자리에 앉혔다. 1861년 6월 예이츠는 그랜트를 '말썽꾸러기 연대'(뒤에 일리노이 제21민병대라는 이름이 붙었음)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랜트는 적과 싸우기도 전에 걸리나 출신의 미국 하원의원인 엘리휴 B. 워슈번의 영향력을 이용해 준장 계급장을 달았고 곧이어 일리노이 주 카이로에 본부를 둔 미주리 남서지구 부대의 지휘권을 얻었다.

군대가 적군을 방어하거나 적의 관심을 돌리는 작전만 펴는 데 만족하지 못한 그랜트는 1862년 1월 헨리 웨이저 핼럭 장군의 허락을 얻어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월 16일 테네시 주 컴벌랜드 강 연안에 있는 도넬슨 요새를 공격해 약 1만 5,000명의 포로와 요새를 손에 넣었다. 이것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거둔 최초의 대승리였다.

소장으로 진급한 그랜트는 4월 6일과 7일에 테네시 주 피츠버그랜딩 가까이에 있는 샤일로에서 남군의 기습을 물리쳤지만, 북군이 너무 큰 손실(1,754명 전사)을 입었다는 항의 때문에 평판이 떨어져, 결국 핼럭 장군이 직접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샤일로 전투). 그러나 1862년 7월에 핼럭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워싱턴으로 가자 그랜트는 지휘권을 되찾았다.

그해 말 그랜트는 미시시피 강 유역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군의 주요 요새인 빅스버그를 향해 진격했으며, 적극성과 탄력성, 독자성과 결단력을 보여 1863년 7월 4일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빅스버그 회전). 며칠 뒤 미시시피 강 유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남군 주둔지인 허드슨이 함락되자 남부연합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는 1864년 3월에 중장으로 진급해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우선 1864년의 군사활동에 대한 기본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은 남군의 로버트 장군을 남부연합의 수도인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근처에 묶어 놓고, 그틈에 윌리엄 터컴셔 셔먼 장군이 서부에 있는 북군을 이끌고 조지아 주를 가로지른다는 것이었다. 6월 중순에 리 장군이 리치먼드 가까이에 있는 게티즈버그에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셔먼 군은 조지아 주를 가로질렀고, 필립 셰리든 장군의 기병대는 버지니아의 철도와 보급로를 파괴했다.

1865년 4월 2일 리 장군은 피터즈버그 전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4월 9일에는 애퍼매턱스코트하우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그랜트의 병력이 리의 병력보다 훨씬 많았으나 그랜트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북군이 버지니아 주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수로는 우세했지만, 이 우세를 가치있게 만든 지휘관은 그랜트뿐이었다. 그는 실로에서 패배한 뒤 다시 일어섰다.

그의 성공은 행정능력, 융통성, 개혁을 수용하는 포용력과 발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1865년말에는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남부를 여행하면서 놀라울 만큼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대통령에게 관대한 재건정책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866년 그랜트는 새로운 직책인 미국육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1867년에 존슨 대통령은 공직자를 해임할 때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관직보유법'이 합헌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육군장관 에드윈 스탠턴을 해임하고 8월에 그랜트를 임시 육군장관으로 임명했다. 의회가 스탠턴의 복직을 요구하자, 장관직을 지키며 문제를 법원의 판결에까지 끌고가겠다고 약속했던 그랜트는 1868년 1월 장관직을 사임함으로써 대통령을 몹시 화나게 했다.

존슨이 그랜트를 비난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깨지게 되었고, 그랜트는 공화당과 유대를 강화해 마침내 18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의 마지막 구절인 "평화를 찾읍시다"는 공화당의 선거구호가 되었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전 뉴욕 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보다 약간 많은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시절

1869년 3월 4일 그랜트는 46세의 최연소 대통령으로서 정치 경험이 전혀 없이 백악관에 들어갔다.

그가 공직에 임명한 사람들은 질적으로 수준이 고르지 못했지만 세네카족 인디언으로 자신의 참모장교였던 엘리 S. 파커를 인디언 문제 담당국장으로 임명한 것은 퍽 참신한 것이었다.

3월 18일 그랜트는 대통령으로서 첫번째 법률인 남북전쟁 때 발행한 그린백 지폐를 금으로 바꾸어준다는 태환법(兌換法)에 서명함으로써 당시의 재정 보수주의자들 편에 섰다. 최초의 공직위원회가 추천한 사람들을 공직에 임명하려 했지만 의회가 동의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포기했다.

상원이 산토도밍고 합병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을 때는 그랜트도 좀더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그는 영국과 워싱턴 조약을 맺어 앨라배마호 배상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그랜트는 187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호레이스 그릴리를 큰 표차로 누르고 쉽게 재선되었다.

선거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언론에서 유니언퍼시픽철도회사의 수익금을 빼낸 미국 크레디모빌리에사와 공화당의 저명한 정치가들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875년에는 그보다 더 심각한 추문이 일어났다. 위스키 도당(Whisky Ring)이 고위 공직자들의 도움을 얻어 정부의 세금 수입을 빼낸 사실을 재무장관 벤저민 헬름 브리스토가 폭로한 것이었다(→ 위스키 도당).

대통령의 개인비서인 오빌 바브콕까지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나자 그랜트는 "죄지은 사람은 아무도 처벌을 면할 수 없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그랜트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장관 윌리엄 벨크냅의 사표를 수리했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벨크냅은 이제 더이상 공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죄판결을 면했던 것이다. 낙담하고 정치에 신물이 난 그랜트는 2번째 임기를 마치면서 "내가 실패한 것은 의도가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이다"고 의회에서 말했다.

그랜트 행정부를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부정사건들에 가려져 다른 긍정적인 측면들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랜트는 남부연합 지도자들에 대한 사면을 지지했고 흑인의 평등을 옹호했다. 그가 법으로 정한 연화(軟貨:금이나 외국 통화와 바꿀 수 없는 화폐)의 양을 늘리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1874) 그뒤 4반세기 동안 통화위기를 줄여주었다. 또한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와 민주당의 새뮤얼 존스 틸든이 출마한 187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부정문제로 논란이 생겼을 때도 이를 잘 마무리했다(→ 1876년의 선거분쟁).

만년

1879년 그랜트는 공화당의 일파가 그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화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금도 애쓰지 않았지만 1880년에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36개의 지구당에서 각각 300표 이상을 얻었다. 그러나 이 전당대회에서 제임스 A. 가필드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81년 그랜트는 뉴욕에 집을 사고, 아들인 율리시스 2세가 동업자로 참여하고 있던 그랜트앤드워드투자회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랜트는 자기 자본을 투자회사에 맡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1884년 회사는 동업자인 퍼디낸드 워드가 투자자들의 돈을 사취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서 그랜트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그랜트 장군의 명성도 떨어졌다.

1884년 그랜트는 〈센추리 매거진 Century Magazine〉지(紙)에 남북전쟁 회고담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일이 자기 적성에 맞자 회고록을 준비했다.

나중에 암으로 밝혀진 목의 통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친구인 마크 트웨인과 회고록 출판계약을 맺은 그랜트는 죽기 전에 회고록을 완성하겠다고 결심했다. 1885년 6월 그랜트 가족은 애디론댁 산맥에 있는 마운트맥그레거의 오두막으로 이사했고, 그는 1개월 뒤 그곳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뉴욕 시의 리버사이드 공원에 묻혔으며 1897년에는 정성들인 묘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