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먼

셔먼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Tecumseh Sh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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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0. 2. 8, 미국 오하이오 랭커스터
사망 1891. 2. 14, 뉴욕 시
국적 미국

요약 미국 남북전쟁 때의 장군.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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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남북전쟁 기간

개요

현대전을 창안한 주요인물이다.

1864~65년 북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부로 진격하여 조지아 주와 남·북 캐롤라이나 주를 휩쓸었다. 그는 종종 "전쟁은 지옥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주인공으로 인용된다.

초기생애

유명한 쇼니족 인디언 추장의 이름을 따서 티컴서로 이름지어진 셔먼은 찰스 R. 셔먼 판사의 8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가 9세였을 때 아버지가 죽었다. 절친한 집안 친구이자 오하이오 정계의 휘그당 실력자인 토머스 유잉이 그를 "사내아이들 중에 가장 똑똑한 아이"라고 하여 양자로 삼았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그의 양모는 이교도의 이름을 가진 아이에게는 어떤 사제도 세례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여 그의 이름에 윌리엄을 덧붙였다. 셔먼이 16세가 되었을 때, 유잉은 동부의 친척들이 '극서부 지방에서 갓 잡힌 야생동물'로 여기는 셔먼에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어주었다.

사관생도가 된 셔먼은 공학·지질학·수사학·철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또한 벌점도 곧잘 받았다.

졸업 후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세미놀족 인디언과의 전쟁에 파견되었다. 인디언은 1명도 못 만났지만 대신 세인트어거스틴의 젊은 숙녀들을 만나 신바람이 났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몰트리로 전출된 그는 찰스턴이 가깝기 때문에 4년 동안 경마, 피크닉, 보트 놀이, 고기잡이, 수영, 그밖의 온갖 것들을 즐겼다.

그는 화가가 될 생각도 해보았다. 남북전쟁 때의 수많은 장군들이 경험을 얻은 바 있는 멕시코 전쟁을 셔먼은 겪지 못했다. 행정장교로 캘리포니아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1850년 셔먼은 당시 워싱턴에서 내무장관직을 맡고 있던 양부의 딸 엘런 유잉과 결혼했다. 그들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살림을 차렸다. 그는 병참장교로서 캔자스와 미주리에서 소를 사들이는 직무에 진력이 났다. 캘리포니아의 금광에 마음이 끌려 1853년 9월 6일 자원 제대하고 루커스터너사(社)의 샌프란시스코 주재 세인트루이스금융회사에 대리인으로 입사했다.

금광의 경기가 폭락하는 바람에 1만 3,000달러의 빚을 졌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을 '금융업의 요나'라고 선언했다. 실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학변호사라는 법조계의 경력이 처음 사건을 맡은 캔자스 주의 레븐워스에서 끝장이 났다. 스스로 말했듯이 그가 '투계장에서 죽은 닭'이 되었음이 새삼 증명된 것이다. 군에서는 그를 복직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남부출신 옛 친구들인 브랙스턴 브래그와 P. G. T. 보리가드가 루이지애나 주립 학문연구 겸 장교양성학교(현재는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 편입됨)의 교장직을 알선해주었다.

그는 교장직이 마음에 들었지만 루이지애나가 연방에서 탈퇴하자 북부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의 피프스스트리트철도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전쟁은 남자들이 맹목적이고 광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라고 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불신했지만, 동생인 존 셔먼 상원의원의 영향력을 이용해 1861년 5월에 미육군 대령에 임명되었다.

남북전쟁 기간

최초의 전투인 불런 전투(1861. 7. 21)가 끝난 후 장군으로 진급한 셔먼은 링컨에게 독립부대의 지휘권을 맡기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도 켄터키에서 부대의 책임자로 임명되자 그는 자기에게 달려드는 남부군의 환영에 시달려 엄청나게 많은 병력증강을 요청하여 정신이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헨리 핼렉 장군과 U. S. 그랜트 장군 휘하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게 되었다(남북전쟁). 그랜트는 셔먼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하여 1862~63년 미시시피 주 빅스버그 공방전에서 눈부시게 싸워 남부군 진지들을 분쇄하고 미시시피 강의 북상 통상로를 다시 개통시켰다. 1864년 그랜트가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과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갔을 때 셔먼은 3개군을 이끌고 조지아 주를 침공하여 애틀랜타를 함락시켰다. 그랜트도 링컨도 셔먼이 6만 병력을 이끌고 애틀랜타에서 서배너까지 가려는 그 유명한 '바다로의 행군'을 지각있는 작전으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뽐내기 좋아하는 셔먼은 적시에 대서양 연안에 도착하여 링컨 대통령에게 서배너 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쳤다. 그랜트는 리 장군을 속이기 위해 버지니아에 있는 삼림지대로 뛰어들고, 셔먼은 남북 캐롤라이나를 관통해 북쪽으로 진군하여 전쟁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다.

셔먼은 정계에 입후보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자기는 지명이 되어도 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당선이 되어도 취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거절했다.

1869년 대통령이 된 그랜트는 셔먼을 육군사령관으로 임명했고 1884년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셔먼은 그의 전쟁관을 "전쟁은 지옥이다"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종신 군인으로 남았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청중 앞에서 연설해달라는 초대를 받으면 즉시 떠날 수 있도록 여행가방을 챙겨가지고 다닌다고 그를 비난했다. 1891년 뉴욕 시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