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버그 회전

빅스버그 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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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 남북전쟁기간에 있었던 일련의 결정적인 전투(1862~63).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멤피스와 뉴올리언스 중간지점에 있는 미시시피 주(州) 빅스버그 시에서 치러졌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남부연합을 둘로 갈라놓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북군 장군 율리시스 S. 그랜트의 군사적 천재성이 입증되었다.

1862년 봄 남부연합이 테네시 주에 있는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 그리고 이어서 뉴올리언스를 잃자 빅스버그는 남부 방어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북부 연방의 주된 목표는 미시시피 강을 건너 남부를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남군은 이 도시의 지형을 이용하면서 포대를 설치하여 강변을 강화했다. 이러한 조치로 방어진지는 6월에 있은 북군의 해군 포격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었다. 북군의 철갑선은 포대의 공격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이 도시에 피해를 입힐 수는 없어 한 달 뒤 철수했다.

육로를 통한 공격을 예상한 남군은 근처 대농장의 노예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하거나 고용해 후위 및 가까운 전략 거점에 요새를 쌓았다. 겨울 동안 북군은 대부분 빅스버그의 외곽에서만 움직였으며, 어떤 부대도 이 도시에 이르지는 못했다. 실전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랜트 장군의 인기가 떨어져가고 있을 때, 그는 빅스버그 시 위쪽 미시시피 강의 루이지애나 쪽 강뚝에 작전본부를 세우고 대담한 이동작전을 구상했다. 1863년 4월 16일 강 상류에 있던 함대의 일부가 빅스버그에 배치된 포대를 돌파했고 이틀 뒤 4척의 보트가 큰 너벅선을 끌고 뒤따랐다.

그동안 그랜트 장군은 강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진군해 브루인스버그에서 그 배들과 만났다. 29일 밤 함대는 그랜트 장군과 만나기 위해 포대를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부대를 강 건너편 15㎞ 아래에 배치했다. 그랜트 장군은 적군이 군대를 모으기 전에 재빨리 이동해 5월 2일에 깁슨 항을 점령하고 5월 3일에 그랜드 걸프에 도착함으로써 잭슨 가까이 있던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의 군대가 빅스버그에 있는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때 남군 최고사령부는 서로 모순되는 결정을 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남부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존 C. 펨버턴 장군에게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빅스버그를 사수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5월 14일 그랜트 장군의 공격으로 이미 잭슨에서 쫓겨난 존스턴 장군은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빅스버그를 포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펨버턴 장군은 존스턴 군대를 돕기 위해 빅스버그에서 나왔지만 서쪽으로 진군하는 그랜트 장군의 군대와 마주치자 빅스버그로 다시 돌아갔다.

5월 18일 그랜트 장군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빅스버그 후위에 배치했고, 이로써 펨버턴 군대는 고립되었다. 공격이 쉽지 않게 되자 그랜트 장군은 포위전술을 쓰기로 결정했다. 7월 3일 포위 부대가 남군 전선에 접근해 갈 무렵 존스턴 장군은 펨버턴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펨버턴 장군 역시 강을 건너 루이지애나로 퇴각할 수가 없었다. 7월 4일 펨버턴은 약 3만 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미시시피 강이 북군에게 개방되었고 남부연합은 둘로 나뉘었다. 빅스버그 전투는 남북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고 링컨은 이 전투로 그랜트 장군을 주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