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수호운동

민족문화수호운동

[ 民族文化守護運動 ]

요약 1930년대 민족 문화의 말살을 목표로 하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 고유의 문화를 수호·육성하려는 운동.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사회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외에 문화 방면에서도 민족의 활동을 억압하고, 한민족 고유의 문화 전통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먼저 교육에서는 한국인의 우민화·황국 신민화에 목표를 두고, 우리 말 대신 일본어를 배우도록 강요하였으며, 우리 역사의 교육도 제한하였다. 또 고등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초급의 실업 교육을 통하여 식민 통치에 활용할 수 있는 하급 기술 인력의 양성에 집중하였다. 언론 활동 역시 크게 억압받았는데,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신문의 발행을 허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기사의 검열 및 언론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일제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무시하고, 타율성과 정체성을 한국사의 특징이라고 강조하였다.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들이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역사 왜곡이었다. 한편 종교 활동 역시 크게 제한하였는데, 여러 사람을 동원하고 지도할 수 있는 종교 활동이 민족 운동의 기반이 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3·1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은 각계 종교 지도자들이 주축을 이루기도 하였다.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강화되는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 계열의 학교를 폐쇄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령·승려법 등을 제정하여 교단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키고,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적극적으로 민족 운동을 이끌었던 천도교와 대종교 등 민족 종교는 일제의 억압이 더욱 심하여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 지도자들은 각 방면에서 민족 문화를 수호·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통틀어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이라고 부른다.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은 무장 투쟁을 비롯하여 정치·외교적 차원에서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차원에서 전개된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국학 운동·교육 운동·종교 운동·문예 운동 등 다방면에서 폭넓게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언론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윤재·최현배·이희승 등이 중심이 된 조선어 학회는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한글 보급 운동을 펼쳤으며, 한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우리 말 큰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으나, 해방 이후 작업을 이어갈 귀중한 자료들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가 독립 운동을 벌인다는 구실로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많은 회원들이 체포되어 갖은 고문 속에 희생되었다.

일제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는 한국사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박은식·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하나의 연구 흐름을 만들었고, 이는 정인보·문일평·안재홍 등에게 계승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백남운 등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한국사 역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역사 발전 과정을 거쳐왔음을 강조하였다. 이병도·손진태 등은 일본의 한국사 연구 단체인 청구학회에 대항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여 한국사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한국의 열악한 교육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는데, 한규설·이상재 등은 조선교육회를 조직하여 한민족 본위의 교육을 강조하였고, 특히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들이 주도한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열기는 일제가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게 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 언론사들은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차별적인 교육 환경 속에서 민족의 역량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농촌계몽운동의 주안점은 한글을 보급하고 문맹을 퇴치하는 것에 있었다.

한편 종교계는 3.1운동 이후에도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의 주체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개신교는 꾸준히 교육 사업 등을 이어갔으며,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다양한 사회사업과 함께 경향 등의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고, 천도교에서는 언론·출판·민중 계몽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대종교는 단군 숭배를 내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교계에서도 한용운 등이 일제에 불교 정책에 대항하였고, 원불교에서는 민족의 자립과 생활 개선을 강조하였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문학계에서는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 문화를 강조하는 작품들이 발표되었고, 연극계에서는 토월회가 민족적 정서를 반영한 작품들을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나운규의 영화는 민족 정서와 저항의식을 부각시켰으며, 미술 및 음악계에서도 민족적 감정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노력으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도 민족 고유의 문화 전통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계승할 수 있었으며, 우리 민족이 일제에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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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를 지킨 항일 운동, 민족문화수호운동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