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설

한규설

[ 韓圭卨 ]

요약 조선 후기의 무신.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을사늑약 체결에서 각료들에게 개별적으로 찬부(贊否)를 물을 때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되었다. 국권피탈 때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男爵)이 되었으나 거절하였다. 그 후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장교동 한규설 가옥

장교동 한규설 가옥

출생-사망 1848 ~ 1930
본관 청주(淸州)
순우(舜佑)
강석(江石)
활동분야 정치

본관 청주(淸州). 자 순우(舜佑). 호 강석(江石). 부사 승렬(承烈)의 아들. 서울 출생. 무과(武科)에 등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 판윤(判尹)을 거쳐 포도대장·장위사(壯衛使)·의정부 찬성(贊成)을 역임, 1905년(광무 9)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어 내각(內閣)을 조직하였으나, 그 해 을사늑약 체결에서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각료(閣僚)들에게 개별적으로 찬부(贊否)를 물을 때 끝까지 이에 반대하였으며 조약이 체결된 후 파면되었다.

뒤에 다시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냈다. 1910년 국권피탈 때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男爵)이 되었으나 거절하였다. 그 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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